수도 서울과 ‘영광된 조국’을 위해 1974년 완공된 1호선에서 나는 피로하다. 한 칸의 전동차 안, 걸음걸음 회의감이 가득하다. 끈적이는 접촉과 불필요한 소란, 낯선 이와 마주 보게 만든 좌석 때문에 시선은 거듭해서 덜 닦여진 바닥으로 꺼진다. 임산부석은 절대 임신하지 않는 이가 차지했다. 1호선의 누린내는 급한 마음의 누군가가 전봇대에 휘갈긴 날 것이 아니다. 사람 한 점에 겹겹이 쌓인 냄새다. 완공된 지 40년이 지난 1호선에서 민주항쟁과 유신, 한국전쟁을 떠올려봐도 내 코는 거룩하지 못하다. 늘 사람이 적은 끝 칸까지 가곤 한다. 노래도 잔잔한 것보다는 ABBA의 ‘Dancing Queen’ 같은 생동감 있는 리듬이 낫겠다.
내가 행복하려면 다른 사람과의 적당한 거리가 없어선 안 된다. 느슨한 연대는 좋지만 그 이상은 버겁다. 누군가 들어오시겠다면 정중하게 뒷걸음치는 게 최선이다. 울음으로 기억하는 보도사진 학회 품평회는 서러웠다. 학회장이었지만 구성원을 이끌만한 능력이 부족했다. 서로의 잘잘못을 환하게 가름할 수도 있겠지만, 뒤늦게 불완전한 기억을 소모하고 싶지는 않다. 좋은 날도 분명 있었지만, 우린 리듬이 안 맞았다. 느리고 신중한 우편배달부가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천진난만한 아이를 실망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았다. 화음을 이루지 못한 목소리는 외롭고 서운하고 높았지만, 달랐다. 그때의 나는 투명한 수채화에 잘못 칠해진 아크릴 물감처럼 굳어갔다. 사람 사이의 엉킨 실타래를 풀만 한 재주는 지금도 없다.
같은 까닭으로 협업은 질색이다. 방송기자보다는 신문기자가 낫겠고, 신문기자보다는 소설가가 좋다. 혼자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 좋다. 글은 안 쓰고는 못 살 거 같아서 쓴다. 정체 모를 감정과 부유하는 개념을 긴 글로 정리하는 재주는 있다. 습작을 쓰든, 기사를 쓰든 브런치에 글을 올린다. 4번의 심사에 떨어지고 된 브런치 작가는 선물로 받은 새하얀 도화지였다. 덕분에 나를 그릴 수 있다. 연필로 사각거리든, 키보드에 타닥거리든 글 쓰는 소리는 작은 구원이다. 차디찬 유리잔에 맺힌 물 자국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라도 코르크 컵 받침은 괜찮다고, 자신이 막아주겠다고 속삭인다. 그러한 사소한 구원이다.
혼자 책 읽고 글 쓰며, 맥주 마시는 시간을 탐한다. 좋아하는 책만 계속 준다면 무인도에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처음의 독서를 따뜻함으로 기억한다. 중학생의 어느 날 나에게 ‘파피용’을 쥐여준 선생은 박하사탕을 들고 다녔다. 책을 읽을 때면 박하 향이 나서 목구멍부터 입안이 전부 화했다. 다 읽을 때까지 가방에 넣지도 못하고 품에 안고 다녔던 그 책이 지금까지도 나를 독서로 이끈다. 내용도, 교훈도 기억나지 않지만, 책의 향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더라도 황홀하게 넋을 잃은 듯 수놓아진 글자를 읽는다. 가지고 다니는 책을 읽고, 안내 책자를 읽고, 광고문을 읽는다. 모든 문장은 가볍게 쓰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고민이 담긴 무거운 결정을 공경한다. 가끔 발견하는 좋은 문장은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외로움과 고독을 구별하며 살아간다. 외로움은 결핍을 뜻하는 감정이지만 고독은 이렇게도 살아지겠다 싶은 삶의 방식이다. 다행히 편애하는 사람들이 있어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 나에 대한 설명이 필요 없는 관계가 좋다. 어떤 생각을 하든, 결정하든 묻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바라보니 편하다.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 몇 명만이지만, 나는 충분하다.
이런저런 생각 하느라 1호선 끝 칸까지 갈 시간을 놓쳤다. 그다지 거룩한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누린내가 잊혔다. 그건 다행인데 사실 나에게 깃든 상념이 많다. 구름 뒤에 숨는다고 없어지지도 않았다. 저번 주엔 학교에서 개인 상담을 시작했다. Haze Moon의 ‘Que Sera, Sera’로 노래가 넘어갔다. ‘될 대로 돼라’라는 뜻의 제목이 많은 위로가 되길래 카카오톡 프로필 뮤직으로 설정했다. 여러 이유로 노래를 등록해두지만, 가끔은 서글퍼서 누군가 알아봐 줬으면 하지만, 이유를 물어보는 이는 없다. 다들 그런 거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