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느린 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연 May 20. 2019

밤이 안주다

밤이 안주다. 치킨이나 감자튀김, 나초는 안주치고 존재감이 너무 크다. 밤의 스산한 풍경을 해친다. 사람 여럿 꿰어 만든 술자리는 산만함이 싫어서 가지 않는다. 둘러댈 핑계는 많다. 20층 오피스텔 건물 콘크리트 표의 17행과 13열이 교차하는 지점이 내 자리다. 부엌과 서재, 침실이 한 자리에 모인 작은 단칸방이다. 볕은 잘 들지 않지만 미닫이창에 고개 내미는 달빛은 그럴싸하다.


안주를 정했으니 다음은 술이다. 맥주, 그중에서도 스텔라를 고집한다. 이름이 예쁜 까닭이다. 와인은 이름이 너무 길고 어렵기까지 한데 소주는 또 너무 쉬워서 끌리지 않는다. 국산 맥주는 밍밍해서 싫지만 세계맥주를 달달 구별하는 수준은 아니니 스텔라 정도면 목 넘김이나 청량감이 훌륭하다. 4캔에 6천원하는 버지 미스터와 맛은 사실 비슷하다. 스텔라는 4캔에 만원이나 하지만 용돈이 부족한 월말만 아니면 스텔라를 마신다. 버지 미스터라니 마치 이 악물고 익스트림 스포츠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싫다.


맥주잔도 중요하다. 가운데 부분이 곡선으로 움푹 들어가야 잡기도 편하고 들어간 만큼 길어져서 세련된 느낌을 준다. 용량은 600mL 정도가 되어야 한 캔을 가득 따르고도 거품 위에 얼음까지 띄울 수 있다. 재질은 유리어야 한다. 그래야 마시면서도 얼마큼 남았는지 알 수 있다. 한 잔을 다 마시는 데는 한 시간 정도가 딱 맞다. 그보다 빨리 마셔버리면 밤이 일찍 끝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두 잔 마시면 될 것을 석 잔 마시게 되고 결국 다음 날 힘이 들어서 안 된다.


옆에는 언제나 마샬 스피커가 있다. 해외 직구를 했음에도 거금이었다. 스피커의 정면엔 'Marshall'이 필기체로 쓰여있는데 철자를 정확히 알아보기 힘드나 베이지색과 어우러져 멋이 난다. 원래 쓰던 샤오미 스피커보다 크기가 큰 만큼 베이스가 더 쿵쿵거리는 거 같긴 하다. 음질이 얼마나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글을 쓸 땐 클래식을 틀고, 글을 읽을 땐 재즈를 튼다. 우울할 땐 인디밴드를 듣는데 갈수록 관성이 강해져서인지 듣던 노래만 찾아서 재생한다. 한 곡만 질릴 때까지 반복할 때도 많다.


다음으로는 컵 받침이 중요하다. 테이블에 맥주를 흘리거나, 물 자국이 묻으면 흐름이 깨지고 청소부터 하게 된다. 실리콘으로 된 컵 받침을 즐겨 쓴다. 나무로 된 건 금방 습기를 머금어 휘어져 버리는 탓에 바로 놓을 수조차 없다. 종이로 된 것은 물을 머금지 못하고, 금속은 너무 차갑고 미끄럽다. 규조토는 물의 흡수는 빠른데 딱딱해서 별로다. 부드럽지만 쫀쫀한 실리콘이 제격이다. 세척도 편하고, 미끄러움도 단단히 잡아준다. 번잡한 무늬는 질색이니 무채색으로 된 단일 색상이 좋다. 혹은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져 있어도 합격이다.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건 이런 것들이다. 나의 주관을 짙게 하고 내면을 풍요롭게 한다. 일상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 맞출 수 없는, 변덕스럽고 복잡한 타인과의 관계에는 충분히 지쳤다. 술자리에 불려 다닐 시간에 내 자리에서 밤을 안주로 삼으련다. 예쁜 잔에 담긴 스텔라와 마샬 스피커, 컵 받침과 함께 책을 읽고 싶다. 여의치 않으면 차라리 잠을 자거나 집 밖 청계천을 걸어 다니는 것도 좋다.


한국에서 살아가야 할 듯한데, 한국적인 것들이 싫다. 집단중심의 문화와 지배중심의 구조가 거북하다. 제사와 결혼제도는 덜어내야 할 게 많아 보이고 나이 문화도 불필요해 보인다. 사회 조직은 어딜 가도 성차별이 만연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적어서 더욱 비참하다. 그래서인지 사회에 나가더라도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다. 소설을 쓰거나, 시를 지으면서 살고 싶은데 굶어 죽을까 봐 걱정이니 신문기자라도 해야겠다. 사실 피할 수 없는 사회생활은 그런대로 참을 만은 하다. 기왕이면 작가가 좋겠지만 내 앞의 수식어로 작가가 붙든, 신문기자가 붙든 살아지겠다 싶다. 또한 나의 관계가 넓어지더라도 버틸 만은 하겠다 싶다. 밤이 안주가 되어준다면 나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나를 둘러싸면 된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라는 학자는 책만 읽던 제 아들을 주위에서 걱정하자, 인간에게는 어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에게도 빛보다는 어둠이 필요하다. 돈이나 지위, 명예 같은 것들은 적당하면 그만이다. 어두운 밤에서 나를 억지로 끄집어내기보다 옆에 있어 주는 관계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의 습작을 첫 번째로 읽어주고 나의 세계를 지지해준다. 나는 그거면 된다. 스텔라나 마저 마시련다. 스텔라의 뜻은 별이라더라. 나의 밤과 어울리는 이름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갑자기' 당신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