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 마지않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를 떠올리면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는 익숙한 문장이 생각난다. 서른아홉에 다섯 번째 자살 시도로 생을 마감한 그의 지난한 세월을 압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의 절절한 고백은 연애, 자살, 문학, 약으로 얼룩진 그의 삶마저도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는 듯 애처롭게 만든다. 나라도 주인공인 요조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별다른 도리가 없겠다 싶은 나머지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되짚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인식하는 현재의 거리를 넓히고 싶다. 내 눈앞의 시간을 거머쥐는 게 그렇게도 중요해서, 잊어버린 옛사람은 없는지 글을 읽으며 이들과 조우한다. 나고 자란 초목과 밤하늘을 사랑해서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그렸던 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 압제와 불의를 겪었던 이들의 고통이 나의 현재로 이어지길 바란다. 유신정권에서 소용돌이치던 표정과 지금의 나의 표정이 겹쳐지면 좋겠다. 이들이 어두운 새벽마다 꾸었을 꿈을 안타깝게도, 여전히 내가 이어서 꾸고 싶다.
거리뿐만 아니라 현재의 폭도 두터워져야 할 듯하다. 내가 개인주의자인 만큼 타인도 소속 집단과 상관없이 개인으로 존중받았으면 한다. 청소년과 여성, 난민, 장애인과 성 소수자의 당연한 권리가 당연해지는 데 힘쓰고 싶다. 그들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기도 한 인생이 되고 싶다. 쉽진 않을 것 같다. 지난 1일엔 스무 번째 퀴어퍼레이드가 열렸다. 무지개는 일 년에 한 번을 겨우 고개 내민다. 인간의 역사는 400만년 됐다는데 퀴어의 역사는 20년을 맞이했다. 카스맥주는 무지개색을 입었다가, 하루 만에 벗었다. 입을 때의 환호는 컸는데 벗을 때는 소리 없어서, 나는 우울해졌다.
글 쓰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은 세상이다. 내 안의 감정과 사회의 무늬를 그려볼 때 글쓰기 외엔 가진 재주가 없다. 반대로 말하면 글 쓸 때 살아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글을 쓴다. 사회의 변화를 확산시키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즐겁다. 유엔이 도입한 '여성역량강화원칙' 소개 기사를 뉴스토마토와 브런치에 실었다. 국내 언론은 지속가능 의제를 거의 다루지 않아서 나의 글이 유일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몇몇 사회적 기업에서 원칙 도입을 약속했고, 나는 잘 읽었다는 댓글을 만났고, 오랜만에 웃었다.
새로운 브런치 매거진을 만들까 싶다. 제목은 '안세연의 일하기'로 정해뒀다. 취업은 아직이지만 코앞이기도 하니까 일할 때의 각오나 다짐을 새겨두고 싶어서다. 사회적기업 로앤컴퍼니에 인턴기자로 합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로톡뉴스라는 신생 언론을 만든 회산데 법의 대중성을 높이고 법률 정보의 비대칭을 해결하겠다는 점이 끌렸다. 일할 때 즐거울 것 같다. 이미 자신을 변호할 수단이 많은 권력자와 달리, 그렇지 못한 사회적 약자에게 발판을 만들어 주고 싶다.
한편으로는 조선일보에서 최종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다. 로앤컴퍼니에 합격했을 때는 조선일보에서 불러도 안 가겠다 다짐했었다. 경험 쌓는 셈 치고 시험이나 쳐보자는 생각으로 임했다. 논술 시험 전날에는 술을 먹었다. 그런데 막상 준비하다 보니 흔들린다. 최근 만나는 사람들에게 로앤컴퍼니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일목요연한 말을 고민했으나 전달은 잘 안 되었던 것 같다. 마지못해 끄덕이는 사람이 많았다. 조선일보에 들어가면 그럴 필요가 없다. 면접만 본다고 말했을 뿐인데 감탄사가 나온다. 두 회사 모두 채용 연계형이다. 고민이다. 조선일보의 합격 발표까지 나와야 정할 수 있을 듯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합격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럽다.
아무튼 글을 써야겠다. 언젠가 인생에 마침표를 찍을 때 다자이 오사무의 첫 문장처럼 ‘아아, 역시나 저도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아버렸습니다’라고 말하든, '그럭저럭 떳떳하게 살아온 것 같긴 합니다만, 그래도 아쉽습니다'라고 말하든 글 쓰면서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 싶다. 감정의 흔적을 붙잡아두면 증거가 될 테니 글이 나를 붙잡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그러니까 첫 번째 문장은 어떻게 쓰일지 약속하지 못해도, 적어도 두 번째 문장은 '그러나 부끄럽지 않은 생애를 보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라고 적을 것이다.
너를 만나야겠다. 나를 나일 수 있게 하는 관계가 있다. 친구가 두 명, 그리고 애인이 있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싶다. 수가 더 늘어나면 마치 저글링 할 때처럼 공을 다 놓쳐버릴 것만 같다. 의외로 저글링에 소질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 운동 신경은 늘 없었다. 어쨌든, 이들에게는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 마주 보는 게 아니라 손잡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설레는 건 아닌데 긴장되지도 않는다. 푹신하고 말랑하면서 간질거리는데 또 속삭이기도 하는, 파스텔 빛깔의 느낌이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들의 색인데 그건 곧 내가 여기서 안전하다는 뜻이다.
글로 끄적이는 바와 살아가는 바가 일치해야 할 텐데, 그래야 하긴 할 텐데 만약 당위성을 제거한다면 나에게 뭐가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본능대로 살라며 나에게 위선 떨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다. 동의하지 않는다. 본능을 배설하는 게 미덕은 아니다. 평생 위선이라 할지라도 인간임을 상실하지는 않겠다. 뭐, 글은 언제나 그럴싸하게 나오는데 사실 잘 될지는 자신이 없다. 한 50년쯤 뒤에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우선은 취업부터 하자. 2주 뒤에 조선일보 합격 발표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