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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Studio Dec 13. 2017

사랑의 생애

이승우 소설 - 사유에 가까운


"사랑이 대체 뭐에요?"


형배가 이 질문 앞에 서게 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으로 형배, 선희, 영석이 등장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사랑' 그 자체이다. 이승우 작가는 '사랑할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라고 말한다. 소설 <사랑의 생애>는 형배, 선희, 영석에게 들어간 사랑이 어떻게 생애를 이어갔는지를 사유한다.


형배는 사랑으로부터 도피하는 자이고, 선희는 상처받았지만 다시 찾아온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이고, 영석은 사랑을 구걸하는 자이다. 소설은 온통 '사랑'이란 단어로 점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는 사랑과 이로 인해 발현되는 그들의 모습은 이상하고 아프고 고통스러워 보인다. '저게 사랑이란 말이야?' 의문을 품는 우리에게 이승우 작가는 세 인물에게 깃든 사랑의 생애를 차근차근, 조목조목 보여줌으로써 '맞아, 저 모습이 바로 사랑이야.'라고 말해준다.   


나는 형배에 가까운 사람이다. 그는 사랑으로부터 도피하는 자라고 말했다. 그는 사랑을 하지 못할까 봐 불안했지만 동시에, 정말 사랑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던 프란츠 카프카와 같은 '난처한 심리적 포지션'에 있다. 그는 선희를 포함하여 자신에게 호감을 표시해온 여자들의 약점을 최선을 다해서 찾아내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호감이 생길라 치면 그랬다. 그의 내부에서 생겨나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정말로 사랑을 하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그로 하여금 그녀들의 약점을 귀신같이 찾아내게 만들었다. 그렇게 형배는 사랑으로부터 도망쳤다. 언제나 도망에 성공했던 그에게 다시, 선희가 찾아왔다. 정확히 말해 선희를 통해 사랑이 그를 찾아왔다. 그의 안에 들어와 생애의 첫 태동을 일었다. 형배는 불가피하게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형배의 사랑에 대한 도주 본능을 보며, 그는 대체 왜 그런 걸까? 의문이 생겼다. 솔직히는 '형배와 닮은 나는 대체 왜 사랑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추워지기 전, 한강에서


최근, 추워지기 전 한강에서 친구들, 그리고 영적 멘토 KIM과 함께 한 대화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만난 KIM은 내게 '요즘 공부는 좀 어때? 원래 영상 전공을 했다고 했지? 졸업작품은 어떤 영화였어? 부영이는 시나리오 쓰는 걸 좋아하니? 왜 좋아하니?' 등의 질문을 하셨는데 모두 지금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들 뿐이었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고,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알려는 노력보다는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한강을 나의 대답으로 대신했다.


'한강이 너무 예뻐요. 오늘 날씨 너무 좋지 않아요?'  


마침 그날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 갔고 그들이 대화하는 중간중간 음악을 바꿔 틀었다. 질문에 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바라보며 선곡에 열중하는 나를, KIM은 대화의 주제에 올렸다.


 KIM: 부영이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와 감정적으로 섞이고 싶어 하지 않고 경계하는 거 같아. 거리를 둬.

경진: 그래서 그런가, 부영이 첫인상이 차가워 보였어요.

KIM: 그런데 부영이가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을 경계하고 섞여 들려고 하지 않을까?

(일동 고민)

KIM: 부영이는 깊은 슬픔을 느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래. 더 이상 그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 거야.


KIM은 상실이라는 각성에 대해 말했다. 사람은 상실을 통해 깨어 알게 된다. 상실의 경중을 떠나, 각자 삶에서 절대치의 슬픔을 경험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매니지 하려고 한다. 일생에서 한 번이면 족할 고통스러운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상실은 사람을 위축시키고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자기보호에 힘쓰게 만든다. 감정의 평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다 보면 나를 잃어버리게 되고 삶이 더 이상 기쁘지도 슬프지도 무언가를 하고 싶어 지지도 않아진다. 인생이 재미없고 우울해진다. 내 상태를 이렇게 읊어주는 KIM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전 사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오랜만에 만난 KIM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이었다. 사랑에 대해서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와 정말 사랑에 빠질까 봐 두려웠다. 나도 모르게 빠져버린 그 사랑이 지옥이면 어쩌나, 사랑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아 두려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래서 차라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을는지도. KIM은 내게 말했다. 상처받았는데 다시 사랑하기로 작정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부영아, 너에겐 용기가 필요해.'라고 말했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내게 해주는 작업이 평생에 필요하다고 했다.


형배의 떠나간 아버지. 사랑을 찾아 사랑을 버리고 떠나간 아버지의 뒷모습. 남겨진 자에게 그 장면은 일생에 걸쳐 반복되고 또 반복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한참 만에 나온 아버지의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면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고 싶은지 모른다. "언젠가 아버지를 이해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남기고 트렁크를 끌고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빠져나갔다. 흡사 달아나는 것 같았다고 그의 기억은 말한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그 모습에 쓸쓸함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기억한다. 달아나는 사람의 쓸쓸함이라니.

이 모순의 문장은 기억에 스며 있는 욕망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한 남자가 트렁크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이것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이다. '달아나는 것 같았다'와 '쓸쓸함'은 그 이미지에 덧붙여진 것이다. 그것들은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목격 한 자, 더 나아가 그것을 진술하는 자의 심상에 새겨진 인상이다. 기억하는 자의 욕망이 행위자의 행위를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형배의 기억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이해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타협의 곡예를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형배에게 새겨진 첫, 사랑의 생애의 모습은 쓸쓸하거나, 지리멸렬 처연하거나, 떠나 사라지거나 남겨져 병들어 가거나였다. 형배에게 사랑은 슬프고 아픈 것이었다.


난 내가 보고 자라 온 모든 것 중에 사랑은 없다고 여겼다. 내가 본 게 사랑 일리 없다고 단정했다. 그 난장판과 피투성이. 고함과 소주병. 추근거림, 때때로 이상하게 밝아지는 엄마의 모습과 축 처진 어깨. 초라한 크림빵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참한 어떤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들 모두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툴고 또 서툴었던 사람들을 통해 살다 간 사랑의 모습.


나는 사랑을 우상 자리에 올려두고 무언가 특별한 것이기를 바랐다. 고통 없는 아름다운 사랑이라던가, 이별 없는 영원한 사랑이라던가. 그러나 이승우 작가가 사랑에는 자격이 필요하지 않고 그저 사랑이 우리에게 들어와 생을 살다 가는 거라고 말한 것처럼. 사랑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보편적인 어떤 것이다. 사랑은 고통을 포함하고, 그런 사랑이 내게 들어와 삶을 살게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사랑의 생애>를 읽다 보니,


'나는 사랑의 신호에 둔해. 나는 둔한 사람이야.'

 

라고만 여겼던 게 사실은,


'나는 사랑에 빠질까 봐 두려워.'


와 동의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사랑의 신호들을 감지했지만 부러 모른 척했다. 나와 그 사람의 관계가 사랑으로 갈 것 같으면 모른 척 말을 돌리고 사랑과 전혀 상관없는 말들을 쏟아내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그 말이 맞다. 나처럼 형배도 그랬다. <사랑의 생애>에서 정말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영석과 선희다. 형배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랑이 그의 몸에 들어와 첫 태동을 일고 자라 해산의 고통으로 신음하며 '사랑이 대체 뭐에요?' 내뱉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된다. 밝고 빛나는 것뿐만 아니라 어둡고 고통스러운 것 또한 사랑임을 알게 되고, 하기에 이른다.  


형배, 선희, 영석을 통해 살다 간 사랑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 우리를 통해 살다 간, 앞으로 다시 찾아 올 사랑에 대한 이야기. 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 이상.


그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휘청거리는 걸 느꼈다. 그에게 사랑은 상승하는 것이었다. 밝고 강하고 충만한 것이었다. 빛을 향해 나가는 것이었다. 오르고 지향하고 누리는 것이었다. 어둠과 결핍과 하락은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런 것들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사랑이었고, 삶이었다. 아프고 모자라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런 삶을 살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그런 사랑을 생각하지 않았다. 행여 그런 사랑을 하게 될까 봐, 말하자면 젊은 날의 그의 어머니처럼, 그래서 아플까 봐, 그래서 약해지고 비참해지고 어둠 속에서 술에 취해 울고 낙오할까 봐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는 혼란을 느꼈다. 그는 자기가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아주 잘못 알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한참 후에 그는 겨우 신음처럼 물었다. 사랑이, 대체 뭐에요?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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