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 더 참을 수 있었는데 왜 나왔어요?
2021년, 성인 ADHD를 진단받았다. 충동성을 동반한 부주의 우세형이라는 설명이었다. 나는 주변에서 ADHD인 것 같으니 가보라고 해서 갔고, 동반한 친구는 스스로를 ADHD로 의심해서 갔다. 친구가 먼저 CAT 검사를 진행했는데 현재 불안도가 높을 뿐 ADHD는 아니라는 결과를 받았다. 확신이 들었다. 나도 아닌 거 같아. CAT 검사 문제 겁나 잘 맞힌 거 같아. 내 결과 확인을 위해 진료실로 들어갔다.
"문진표 상으로도 ADHD인데, 검사 결과 확실히 ADHD네요. 약 먹어 봅시다."
그렇게 2023년이 되었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는, 내 지난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난 왜 이렇게 게으르고, 할 일을 미루고, 까먹고, 정신이 없을까. 끈기 없는 거 같다가도 또 어떤 일은 왜 이렇게 멈출 수 없을 지경으로 빠져들게 되는 걸까. 사람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등등.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선천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앞으로의 삶에서 ADHD를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이나 살아온 내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정신과 치료를 통해 멍한 것이 걷힌 듯한 상태를 경험했다. 정신이 맑다는 게 이런거구나, 했다. 그 힘으로 필요한 습관을 만들거나 불필요한 습관을 없앴다. 그러니 차차 업무 중 하고 싶지 않은 일도 그냥 저항감 없이 하게 됐다. 식곤증이 사라지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서 벗은 옷을 정리하고, 낮동안 '집에 가면 해야지' 생각하던 일을 실제로 진짜로 하게 됐다. 사랑하는 친구들, 가족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되고, 주일 예배를 드리는 동안 책에 낙서를 하지 않게 되었다. 미루고 미루었던 운전면허를 따고 바로 중고차를 샀다. 작년부터는 수영도 시작했다. 약 때문에 좋아진 부분이 분명 있지만 평생 약에 의존할 수 없으니 체력을 키워야 했다. 처음엔 오후 7시 월수금 반으로 시작했다. 수영이 좋았다. 저녁에는 수업 빠질 일이 많아지니 새벽으로 옮길까 싶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오전에 땀이 날 정도의 격한 운동을 하는 게 ADHD에 좋다는 글을 보았다. 운동이 도파민 생성에 도움을 주어 그날 하루를 차분하게 보내게 해 준다는 거였다. 겸사겸사 새벽 6시 월수금 반으로 옮겼다. 적응 후 새벽 6시 매일반으로 옮겼다. 이제는 수영 가지 않는 날이 더 피곤하다. 새벽수영 두 달 차, 수력 9개월 차 되겠다.
ADHD는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준다. 그런데 잘 훈련하면 활력 또한 준다. 넘쳐나는 에너지를 선한 과몰입에 사용한다. 수영이 그렇다. 수영을 하고, 수영 일지를 쓰고, 수영에 관련된 영화를 보고, 수영 이야기를 하는 책을 읽는다. 사람들에게 수영의 이로운 점을 알린다. (실제로 수영 전도해서 수친도 많이 생겼다. 할렐루야!) 수영을 하다 보니 물이 편해지고, 물이 좋아졌다. 물에서 하는 스포츠를 하나씩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3년 새해를 맞아 프리다이빙 자격증(초급반) 강습을 결제했다. 그리고 첫 수업에 다녀왔다. 새벽에 자유수영 가서 놀수로 (나름) 워밍업 하고 약도 잘 챙겨 먹고 갔다. 나는 특히 청각적 주의집중력이 약한 편이다. 말로 설명을 들으면 대부분의 정보가 돼지바에 붙은 크런치 초콜릿처럼 훌훌훌 바닥으로 떨어진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강사님이 "여자분들은 탈의실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에 샤워실이 있어요."라고 말하면 "여자분들 탈의실로 들어가세요."로 듣는다. 한두 가지 (꽤 중요한) 정보를 빠트린다. 탈의실에 들어가 라커에 옷을 벗어놓고 목욕 바구니를 들고 샤워실을 찾았다. 문이 보이길래 냅다 문고리를 잡았는데 살짝 벌어진 틈새로 이런 장면이 보였다. 파랗게 반짝이는 영롱한 풀장. 싸했다. 열어제끼려는 것을 본능적으로 멈추자마자 "거기 아니에욧!" 외치는 자매님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소름 끼쳤다, 정말. 올네이키드로 잠수풀장 문을 열어제낄뻔한 것이다. 나중에 집에 와서야 강사님이 탈의실 들어가서 오른쪽이 샤워실이라고 했던 걸 기억해 냈다. 아, 제발 나란 인간아 정신 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수업 내내 이런 일이 반복됐다. 강사님이 말로 설명해 주고, 직접 보여주고 그다음에 강습생들이 따라 한다. 처음엔 괜찮았는데 슈트를 입고 차가운 물에 떨고, 긴장을 하니 점점 강사님의 말 대부분이 크런치 초콜릿이 되었다. "이해했죠?"라고 물으시는데 분명 이해는 했는데 순서를 기억할 수 없었다. 배운 것 중 제대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나름 수영 9개월 차, 물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겠다, 가기 전엔 어쩌면 나 프리다이빙 천재 아닐까? 이런 상상까지 했는데. 현실의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못하는지 인식하는 것조차 안 돼서 우왕좌왕 허둥지둥 대고 있는 꼴이었다. 스스로 멍청하다는 생각이 드니 주눅이 들었다. 강사님은 가르칠 땐 단호하되 자신감 있게 하라며 격려와 칭찬을 잊지 않았다. 같이 수업 듣는 다른 수강생들은 곧잘 따라 했는데 그들 또한 나를 도와주고 기다려주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수업을 마치고 강사님은 다음 수업 안내와 함께 나를 콕 집어 다시 한번 격려해 주셨다.
낙담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난 원래 배우는 게 오래 걸리는 사람이니까.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하다 보면 언젠간 편안하게 하게 될 날이 결국 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으니까. 주차장에서 차 빼는데만 20분, 30분 거리를 (막히지도 않는데) 1시간씩 걸려 달려왔던 운전도 그랬다. 초보운전의 아득한 밤을 잘 지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날마다 차를 몰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베스트 드라이버 첫째 날이니라, 의 날이 오기를 바라고 바라며 그날 주어진 그날의 운전을 해나갔다. 지금은 운전 썩 잘한다. 수년 전 3개월 정도 수영을 배우다 일을 시작하며 그만두었다. 그때 같은 반이었던 할머니에게 '너는 왜 점점 더 못하니!'란 말을 들었었는데 지금은 우리 초급반에서 자유형 1번으로 출발한다. 내 전체 삶이 그래왔다. 나의 첫 스태틱(호흡 참기) 기록은 1분 24초다. 물에서 나와 회복 호흡을 한 나에게 강사님이 한 말이다.
"더 참을 수 있었는데 왜 나왔어요?"
어떤 이슈로 더 참지 못하고 나왔는지 알아야 피드백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물은 말이다. 회복 호흡하는 모습만 봐도 몸속에 숨이 남아있는데 그냥 나왔는지, 정말 참을 수 있을 만큼 참고 나왔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강사님은 내게 남은 호흡이 있었다고 분명히 말해주었다. 사실 그랬다. 정말 참을 수 없어서 나온 게 아니라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 강사님의 저 말이 다시 생각났다. ADHD 치료 중 경과를 보기 위해 종합심리검사를 받았다. 나에 대한 보고서를 10장이나 받았다. 정서상태에 대한 첫 문장이다.
"수검자는 심리적인 어려움을 부인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어지는 문장은 '적정 수준의 심리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으로 지속되어 온 스트레스 요인과 현재 경험하는 불쾌감 수준이 높아 심리적 대처 효율이 낮은 것으로 평가됩니다'이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느끼고 견디는(holding) 힘이 부족하다고 말이다. 조금 더 참을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숨이 내 몸속에 남아있음에도 나는 '내가 과연 더 견딜 수 있을까?'라는 스트레스를 견디고 싶지 않아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야 만다.
수업 내내 나의 근력 부족을 직면했다. 며칠 전에는 양팔 접영 연습하다가 오른쪽 기립근이 제대로 뭉쳤다. 무언가 오래 지속하는 체력은 좋은데 그에 비해 힘을 쓰는 근력은 형편없다. 체력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원래 좋았다. 중학생 때 체육 실기 과목에서 유일하게 성적을 낸 것이 오래 달리기였다. 그냥 오래 달리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근력은 좀 다른 문제였다. 악을 쓰며 견뎌야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악 쓰는 것도 싫고 견디는 것도 싫다.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그냥 다 싫은 것이다. 싫은 건 죽어도 하기 싫고. 내 몸통의 반이나 되는 기다란 핀을 신고 발차기를 하니 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두 다리가 엉키고 몸이 뒤집히고 여기저기 붙잡을래도 잡히지도 않고 아주 가관이었다. 대체 어디다가 힘을 줘야 두 허벅지가 움직이는 건지 감도 못 잡았다. 수업이 거의 끝나갈 때쯤에서야 앞으로 몸이 쑤욱 나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허벅지와 닿는 엉덩이 아래쪽이 접힐 정도로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집에 오며 이제 고통스러울지라도 조금씩 근력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당분간 프리다이빙을 1순위로 두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 수업받기 전까지 상상 속의 나는 프리다이빙 천재였다. 한번 가르쳐줬는데 막 따라 해. 막 유유자적 즐기면서 하는 거야. 그런데 현실의 나는? 물속에서 갓 태어난 기린베이비 같았다. 상상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 이 차이를 줄이려면 현실의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 직접 경험하고, 부족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운동도 그렇고, 일터에서도 그렇고, 일상에서도 그렇고 앞으로의 연애에서도 그렇고. 프리다이빙 영화를 보며 내가 그 주인공이라고 상상만 하면 그건 실재가 아니다. 상상은 고통도 없고 노력도 필요 없지만 말 그대로 진짜가 아니다. 정말 내 육체를 물속에 담그고 허우적대고 숨을 헐떡이고 핀의 길이와 물의 무게를 내 몸이 전혀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도 하고 실망도 하고 다시 용기 내서 도전도 하고. 이런 게 실재고, 진짜 삶인 것이다. 무결한 삶엔 진짜 사랑이 없다. 그런 삶엔 사랑할만한 귀여운 구석이 하나도 없을 테니까. 뭐 거창하게 말했지만, 프리다이빙 앞으로도 열심히 해보겠다 그 뜻이다.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자 데이먼 영의 저서를 읽고 수영하며 접하는 숭고한 경험의 중요성을 이해했다. 18세기 철학자들은 대립하는 자연의 힘과 관념이 충돌할 때의 초월성과 위력을 고찰했다. 고통과 쾌락, 공포와 경외, 두려움과 유쾌함, 삶과 죽음. 영은 "오늘날 수영할 때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욕구가 없는 상황에서도 생존을 향한 열정에서 희열을 맛본다"라고 적었다. 우리는 수영하면서 삶 그 자체의 강렬하고도 생생한 경험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수영의 이유」 보니 추이
삶 그 자체의 강렬하고도 생생한 경험,
프리다이빙 첫 강습 후기 끝.
「냉면 랩소디「냉면 랩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