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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래 Feb 07. 2024

1월 지리산 : 겨울 설산 종주


산에 간다고 하면 질색팔색 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로 내려올 걸 왜 올라가느냐는 둥 산 밑에서 막걸리에 도토리묵 먹으면 맛있지만 굳이 거기까지 가서 먹어야 하느냐는 둥. 아니요, 저기요...? 같이 가자고 했던가, 막걸리는 산에만 판다고 했던가. 그저 산에 갈 거라는 한마디에 과장되게 손사래 치고 철벽을 치는 부류와의 반목은 민초-반민초보다, 부먹-찍먹보다도 오래되고 결연하다. 하여 그럴 때 영혼 없는 ‘그렇구나’로 흘려 넘기는 기술쯤은 기본으로 장착했거늘, 희한하게 겨울만 되면 나도 모르게 신이 나서 괜한 소리를 거들게 된다.


“그래도 혹시 관심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겨울 설산은 꼭 시도해 줘! 눈이 소복이 쌓여 있으면 폭신해서 무릎도 다리도 덜 아파. 진짜야!”


어린잎 싱그러운 초여름의 산도 색색깔 화려하게 물든 가을의 산도 '대자연컵 매력 대회'를 열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힐 거다. 하지만 그래봤자 어쨌거나 산이다.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라 정체성의 혼란 없이 결국 산이라는 것.


하지만 설산을 걷다 보면 어쩐지 다른 차원의 시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눈이 많은 곳은 확실히 푹신해서 살짝 달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하고, 상고대 우아한 나뭇가지들 사이를 지나다 보면 설국열차에서 내려 이제 막 빙하기가 끝난 지구에 한발 한발 내딛는 것 같은 기분도 드는 거다. 이 경험을 한번 하면 일단 등산이 생각만큼 힘들진 않다고 속기(?) 쉽다. 또, 남들이 어렵게 여기는 미션을 클리어했기에 성취감과 만족감이 치솟으면서 산에 마음을 여는 건 시간문제가 되고 만다.



처음 설산을 경험한 것은 10년 전, 14년도 1월이었다. 등산을 좋아하는 지인 몇이 지리산 종주를 할 거라는 말에 권하지 않았는데 철써덕 따라붙었다. 그때는 설산의 매력은 잘 몰랐고 종주라는 걸 해 보고 싶었다. 혼자라면 엄두도 못 냈겠으나 여럿이 함께라니 가야지, 가야지!


용산역에서 밤기차를 타고 새벽에 구례구역에 내려 먹었던 뽀얀 재첩국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그날 수원역에서 합류해 처음 만났던 지인의 지인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파트너다. 당시엔 각자 연애를 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이후 비슷한 시기에 싱글이 되고 또 한참이 흘러 연인이 되었다. 그는 그때로부터 10년 전인 04년도 1월에도 지리산 등반 경험이 있다고 하여 이렇게 된 거 매 10년 차마다 지리산 등반을 하기로 했고, 24년도인 올해 그와의 두 번째 지리산 설산 종주를 다녀왔다.


지리산 국립공원은 그 면적이 광주광역시에 맞먹을 만큼 넓고 크다. 봉우리는 수십 개, 능선도 20개가 넘으며 산중 숙박이 가능한 대피소가 7곳이 있다. 10년 전엔 노고단에서 시작하여 연하천 대피소, 장터목 대피소에서 묵는 총 2박의 일정이었다. 이번엔 나이가 들어 그런지 2박까지 하자니 좀 꾀가 났다. 자차로 이동하려면 주차한 곳으로 다시 내려오는 게 편하기도 해서, 백무동 왕복 코스를 선택했다. 백무동에서 곧장 장터목으로 올라갔다가 다음날엔 세석을 지나 다시 백무동으로 오는 코스. 지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 게재된 코스만도 16개니 어차피 1박이냐 2박이냐는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봐야 찔끔 찍먹일 뿐이니.


지리산 탐방로 등급 지도 (출처: 지리산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에 가면 각 코스의 구간별 난이도를 확인할 수 있다. 내 경우 난이도보다는 교통수단에 따른 출도착 지점을 기준으로 코스를 1차 선별하는 편이지만 초심자 거나 체력 상태에 따라 필요한 경우 난이도를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국내여행을 하면서 느낀 건데 국립공원뿐만 아니라 크든 작든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곳들은 지자체 홈페이지 등에 정보가 꽤나 잘 나와 있다. 간혹 지역 활성화를 위해 이벤트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한 번쯤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올겨울은 비교적 따뜻한 날이 많아 눈이 많이 없을까 봐 조바심이 났었다. 하지만 한라산 다음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리산. 호락호락 녹아내릴 그런 산이 아니다. 백무동 초입까지만 해도 설마 싶었지만 금세 눈 덮인 오르막이 나타났다. 변태 같은 짜릿함을 느끼며 찬찬히 오르다 보니 몸이 빠르게 데워져 시작부터 옷가지를 벗어젖혔다. 바람막이, 후리스 집업, 후리스 긴팔 셔츠, 반팔. 총 네 겹 중 반팔만 남기고 모두 벗었다. 길목마다 만났던 하산하는 분들이 반팔에 놀라며 엄지를 치켜세우시는데, 막 되게 젊고 건강하고 혈기왕성해진 기분이 들어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하하... 실상은 그저 몸에 열이 좀 많다-.-)



참샘에서 소지봉까지 구간은 자비가 없다. 꽤 가파른데 잠시 쉴 만한 능선 없이 쭉 뻗은 오르막이다. 이럴 땐 아무 생각이 안 들기도 하지만, 더더욱 아무런 생각 없이 쉬지 않고 오르는 게 제일 좋다. 멈춰설 수록 심리적, 신체적 부담이 쌓여 힘도 더 들고 시간만 지체된다. 돌아서 내려갈 게 아니라면, 그렇다고 즐기기도 어려운 상태라면, 그저 해치우는 기분으로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 오르막 선수이자 인생의 풍파 깨나 겪어 본 자로서의 비밀 아닌 비기랄까.


대피소는 남녀 숙소가 분리되어 있다. 남자의 코골이 비율이 훨씬 높다 보니 남녀 분리만 돼 있어도 여자 입장에선 한결 잘만 하다. 코골이에 방귀에 에어매트 뽀지락거리는 소리, 거 참 너무하다는 탄식에 민폐남 색출하겠다고 랜턴을 마구 휘두르는 2차 가해(?)까지. 남자방은 대환장 파티가 아주 뻑적지근하게 열렸다던데 여자방의 밤은 제법 평온하게 지나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두 번째, 그는 세 번째 천왕봉 일출 산행을 감행했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그는 세 번째 일출 구경에 성공했다. 아니,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며?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들 기분 좋으라고 그냥 하는 말이려나? 다른 계절에 오면 다를까 싶기도 한데, 씻을 수 없다면 겨울 말고 다른 계절에 올 엄두는 나지 않으니 아마 앞으로도 계절 때문인지는 끝내 모를 것이다.


일출도 일출이지만 겹겹이 그라데이션 돼 보이는 능선들이 너무 좋다. 거대한 스케일의 칼군무를 본다면 비슷한 느낌일까? 스케일과 멋으로 압도하는 장엄하고 찬란한 아름다움. 구질구질 덕지덕지 수식어를 갖다 붙여 때를 묻혀도 세상 고고하고 우아할 아름다움 앞에서 술 취한 주정뱅이처럼 '크으~~~' 밖엔 표현하지 못하는 형편이 참으로 안쓰럽고 한스럽다.



이번 산행에서 단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면 상고대를 보지 못한 거다. 그래도 상고대가 없을 정도의 기온과 바람 상태 덕에 등반이 수월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 세상에 나쁘기만 한 일은 없으니까. 설산은 또 가겠지만 지리산 설산은 다음 10년 후를 기약하며 내려왔다. 나이를 생각해서 60대인 2044년까지 두 번만 더 오자고 약속했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34년도, 44년도에도 함께 깔깔대며 다녀올 수 있기를.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지리산 1박 2일 설산 종주 동영상 보기


tip ✐

1. 대피소 예약은 매월 1일, 15일 두 차례 진행돼요.
- 1일에서 15일 사이에 숙박을 원하면 그 전달 15일에, 16일~말일 사이에 가고 싶다면 그달 1일에 예약해야 해요.
- 1월 1일, 3월 1일처럼 1일이 휴일인 경우는 2일 또는 3일에 예약을 진행하기도 하니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를 꼭 확인하세요.

2. 대피소 1박 가격은 12,000원!

3. 대피소에 먹을거리는 물과 햇반만 판매해요.
- 그 외 아이젠, 우비, 면장갑, 랜턴, 건전지, 가스 정도의 산생활 생필품에 해당하는 품목도 구매 가능.

✐ 준비물은 개인차가 있을 수 있으니 여러 후기를 참고해보세요. 걱정되거나 애매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남겨주세요. 아는 만큼은 기꺼이 알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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