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가지지 못한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하기가 쉽지 않다.
부촌에서 태어나고 자라 가난을 모르고, 가난한 사람과 깊고 가깝게 지내지 않은 사람에게
가지지 못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 달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들에게 가난은 유니세프나 월드비전 홍보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일 것이고,
자신과는 평생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둘째가 갓 돌이 지났을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냈다.
단 몇 시간 알바라도 해서 생활비에 보태겠다는 마음 반,
이대로 하루종일 집에서 살림하며 아이만 돌보다가는 답답함에 미쳐버릴 것 같다는 마음 반이었다.
아기들이 어린이집에 적응하기 위해 1~2시간 짧게 있다가 오는 3월 초 시기에
같은 반 아기 엄마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육아의 고충도 이야기하고, 서로 정보도 나누며 유대감이 깊어졌다.
자연스럽게 속에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
친밀감의 표시였을까, 다른 사람 흉을 보는 대화도 간간이 나왔다.
가장 주된 대상은 남편과 시댁이었다. 다른 문화임을 서로 이해하기 전의 젊은 부부들이었고,
넓은 마음으로 시댁과 남편을 모두 이해하기에는 육아가 낯설고 고되었던 젊은 엄마들이었다.
부촌에서 태어나 공주처럼 자란 엄마들 중, 시댁 역시 부잣집은 경우는 덜했으나
넉넉하지 못한 집 아들과 결혼한 엄마 하나가 유난히 불평이 많았다.
어쩌면 새가 듣고 쥐가 듣는 이야기들이 반포 토박이 시댁에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뉜 것일 수도 있었겠다.
잘생기고 능력 있는 남편에게 큰 자부심이 있던 만큼이나
평범한 시댁에 불만이 많았던 그 엄마의 눈에는
아껴 사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지지리 궁상으로 보였나 보다.
내가 듣기에는 그 지지리 궁상이 꼭 내가 사는 모습 같았다.
이 엄마에게 속으로 나만의 벽을 쌓아가던 어느 날,
옆집 사는 엄마에 대한 불만도 들었다.
"복도에 아이들 자전거며 유모차를 내놓아서 너무 불편하더라고.
혼자 쓰는 복도가 아닌데, 옆집은 생각도 안 하나 봐.
내가 보니 그 집은 전세인 것 같던데."
전세로 사는 것과 상대방을 배려하는 인성을 갖춘 것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었을까?
그 엄마에게는 있었나 보다.
역시 어리고 철딱서니 없었던 나도 마음의 벽을 하늘 높이 단단히 올렸다.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자격지심은
집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품게 했다.
2013년 당시 그 엄마가 살던 길 건너 25평 신축 아파트는 이미 8억 원을 넘었을 때였고,
내가 살던 재건축 아파트 전세는 2억 4천만 원 수준이었다.
지금이야 적금 모두 끌어모으고 5억 대출받아서 집 사면 되겠네, 할 수도 있겠지만
11년 전의 나에게 5~6억 원은 평생을 갚아도 부족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래도 꼭 집주인이 되고 싶었다.
2008년부터 이어진 부동산 하락장으로 '집을 왜 사?'라는 인식이 많았던 시기였으나
아끼고 아껴 모은 돈을 2년마다 폭등하는 전셋값으로 집주인에게 갖다 바치기도 속상했고,
2년마다 이사 다니며 '아이들이 아직 어리네요'라면서
집이 상할까 봐 탐탁지 않아 하는 눈길도 받아내기 싫었다.
'내가 꼭 집을 사고야 만다'라는 생각을 2년 동안 다지니,
2015년 살던 집의 전세금을 받아 월세로 돌리고, 전세를 끼고 내 집을 살 수 있었다.
비록 당장은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내 집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배가 부른 듯했다.
지금이야 소위 갭투자라면서 투기꾼으로 보는 시각도 많이 있지만,
나는 그저 아이들 전학시키지 않고 눈치 안 보고 살 집을 마련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어쩌면 그 엄마는 나에게 귀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