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반포의 낡은 아파트에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별다방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7호선 전철역에서 나와 바로 이어진 상가 1층에 별다방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좋은 위치에서 내가 살게 되는 건가' 하고 마음속으로 정말 좋아했었다.
전세가가 상대적으로 낮아서 그렇지, 재건축 예정 아파트였기 때문에 집값은 상당히 비싼 곳이어서
'나도 부촌에 사는 사람이다.'라고 뿌듯해하기도 하고.
녹물이 나오는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랑스러움을 가질 수 있었다.
동향의 복도식 아파트였기 때문에 같은 평수 남향집보다 좁고 어두웠지만,
어차피 아침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하고 오면 그다지 상관없었다.
둘째를 낳아 하루종일 집에서 머무르기 전까지는 별 상관없었다.
첫째의 어린이집과 유치원 친구들 집에 초대를 받아서 놀러 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격차를 실감했다.
같은 단지 아파트라도 리모델링하고 인테리어가 깨끗하게 되어 있는 중대형 집에 가 보니 낡은 아파트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제야 '동굴 같은' 우리 집에서 함께 놀던 아이를 데리러 왔던 친구 엄마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 표정이 이해되었다.
길 건너에는 유명한 신축 대단지 아파트가 있었다.
당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커뮤니티 시설'을 아파트 현관 키로 이용하는 것도 신기했고, 시냇물이 흐르는 오솔길을 걷는 듯한 산책로 또한 환상적이었다.
거실이 운동장처럼 넓은 집을 자가로 가지고 있는 아이 친구 엄마를 보니 자연스럽게 벽이 느껴졌다.
아이들의 장난감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한 고급이었고, 같이 먹자고 내온 간식 또한 모두 유기농 제품이었다.
병원 원장님이신 친구 아이 아빠가 해외 학회 참석 중이시라 늦게까지 편하게 놀다가 가라는 말에, 고맙다고 미소 짓는 내 얼굴이 어색하지는 않았을까 순간 걱정도 들었다.
길 안쪽에서도 나는 동네 차상위 계층이었는데, 길 건너에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있었다.
정말 다행인 건, 아이들은 똑같다는 것이다.
똑같이 밝게 웃고, 똑같이 놀이터에서 뒹굴고, 똑같이 파워레인저를 좋아했다.
똑같은 아이들과 함께, 육아와 살림에 지친 엄마들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대화 중간 언뜻언뜻 나타나는 격차는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고 기억한다.
'여기까지는 괜찮아' 하는 선을 넘기 전에는 서로를 배려하는, 지성을 갖춘 엄마들의 모임이 참 편안했다.
첫째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2015년 첫째가 학교에 들어간 후 아이들의 학습 능력 차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아이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다툼이 일어나자 엄마들 사이에서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마침 재건축 단지 한 곳이 이주를 했기 때문에, 자기 집을 가진 사람과 전세로 떠돌아야 하는 사람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
"다시 들어갈 때까지는 참아야죠 뭐."라고 편안하게 말하는 엄마들과, 한 해가 다르게 오르는 전셋값이 감당되지 않아 시름하는 엄마들.
이주와 더불어 부동산 상승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엄마들 사이에서도 집값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자주 오갔다.
눈에 띄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비싼 학원을 보내고 과외를 붙일 수 있는 엄마와
문화센터나 복지관 수업을 보내는 엄마.
사는 집과 살림살이에 걱정이 없이, 필라테스를 다니고 밍크코트를 공동구매로 싸게 샀다면서 좋아하는 엄마들과
내가 다닐 헬스장은커녕, 아이를 운동 시설에 보낼지 말지 한참을 고민해야 하고 가계부에 한숨짓는 엄마.
"이 동네에서 맞벌이하는 엄마는 의사 변호사 엄마들밖에 없죠."
전문직이 아니어서 전업주부라는 자신을 탓하고, 육아에 손이 많이 간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동네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는다는 마음도 은연중에 들렸다.
그렇게 물속에 혼자 떠다니는 기름방울처럼 섞일 듯 섞이지 못하고 지냈으나, 아직 젊으니 희망이 있다고 막연하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도 이곳에 어울리는 주민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세상을 모르는 30대 아이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