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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드웬디 Sep 01. 2024

왜 거꾸로 왔어요?

비록 살고 있는 집이 월셋집이고, 다달이 생활비가 빠듯하다 해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알려진 부촌 아파트 한 칸의 주인임은 더할 나위 없는 뿌듯함을 주었어요.


나중에 내 집에 이사 들어갈 때 전세금을 내주어야 하니 적금을 차곡차곡 모으자는 생각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괴로움이 아니라, '그곳에 내가 살게 된다'는 기쁨이었지요.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행복한 시절에도 어김없이 적용됨을 알려주려는 듯,

또 한 번의 이사 통보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제 강북으로 이사 가야 해. 이번에 이사 가면 20년 동안 살 거고."


믿을 수 없었어요.

지금 내가 2016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것 맞지? 하며 귀를 의심했어요.

1600년대 조선에 사는 사람처럼 사주팔자에 따라 이사를 해야 한다니요.


당시 저는 알지 못했지만, 강남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모두 사주에 있었다고 합니다.

강남으로 이사 가서 'ㅅ, ㅈ, ㅊ'으로 시작하는 동네에 그런 아파트에 살아야 하고,

6년 동안 살다가, 이후 20년 동안은 강북으로 이사를 해서 살아야

아이 아빠 일도 잘 풀리고, 가족 모두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답니다.


배신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결혼을 해서 함께 사는 사람도 저이고,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도 저인데

제가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를 철학관 아저씨와 시어머니께서 정하신다는 것이요.


'어른 말씀을 따르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를 이번에도 여러 차례 들어야 했고,

'애들 아빠에게 좋은 것이 우리 가정에 좋은 것이다.'를 되뇌며 이를 악물고 이사 갈 집을 알아보러 다녔습니다.


잠원동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다 해도, 나름 반포 사람이었다면서 도심에서 완전히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애들 아빠 직장도 강남이었기 때문에, 서로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여 동부이촌동에 터를 잡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철학관 아저씨가 제시한 집을 찾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ㅅ, ㅈ, ㅊ'으로 시작하는 동네의 'ㅅ, ㅈ, ㅊ'으로 시작하는 이름의 아파트 중에, 남향이고 현관문이 동쪽을 바라보지 않는 집.


20년을 살아야 한다니까 매수를 해서 이사를 오는 게 좋을 텐데, 하며 몇 달 동안 집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한 서울의 아파트에서는 좀처럼 마음에 드는 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집은 가격이 너무 비쌌고요.

서빙고동의 ㅅ으로 시작하는 아파트를 무리해서 샀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아이들 초등학교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몇 년 후를 기약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전세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반포의 집에서 전세금을 올려 받은 것으로 여기 집을 산 후, 1 가구 2 주택 비과세로 반포 집을 팔려고 했던 것인데,

이번에는 그냥 전세자금 대출을 적게 받고, 기회가 되면 매수하는 것으로요.


그렇게 나름 머리를 써 가며 조건에 맞는 집을 전세로 계약한 후 이사를 준비하는 3개월 사이,

용산 집값이 폭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현관문 방향이 맞지 않는다고 하여 매수를 포기한 집이 3개월 만에 2억이 올라 거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부터 사주팔자와, 그를 따르는 시댁에 대한 온갖 불만과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낯선 곳으로 전학을 해야 하고,

저는 꿈꿔오던 삶을 하루아침에 수정해야 하고,

내 의지대로 살지도 못한다는 속상한 마음을 집값으로라도 만회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오히려 기회를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 내내 불만과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좋은 운을 얻기 위해 사주팔자에 따른다고 한들,

사람의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차라리 알지 못했다면 이렇게 속상하지나 않았을 텐데!' 라며 소리 없는 불만이 몸에 쌓여가는데,

모처럼 찾아오던 복마저도 그 불만의 기세에 눌려 도망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삿날 이삿짐센터 직원분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몇 번을 들은 질문에

저는 소리 없이 울음을 삼켜야 했어요.


그런데 왜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사하세요?
이제 아이들 크면 다들 강남으로 가던데.


"그러게요. 애들 아빠 회사 일로 그렇게 되었어요."



좋은 운은 좋은

아무리 풍수지리적으로 훌륭한 명당이고, 사주팔자에 딱 맞는 곳이라 해도

그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이 지옥이라면 좋은 운이 올 수가 없을 거예요.


혼자만의 전쟁을 치렀지만, 이사를 온 동부이촌동은 그야말로 평화로운 곳이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남산타워가 주방에서 보이고, 걸어서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강 공원으로도 갈 수 있는,

마음만 편안하다면 휴양지에서 사는 기분을 누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50년 전 부촌으로 이름을 날리던 동네답게,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기품이 있고 여유 있어 보였어요.

동네 사이에 있는 4차선 도로가 간혹 막히는 경우가 있어도,

경적 소리 거의 없이 차근차근 양보 운전이 당연한 곳이었습니다.


강요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온 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손에 쥐지도 못했으면서 잃어버린 것 같은 그 기회가 아예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떨궈버리고 싶은 이 속상함이 없다면 여기처럼 살기 좋은 곳도 참 드물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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