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의 정현 Sep 03. 2024

취해서도 널 보러 가지 못한 이유

어쩌면 그날이 우리의 헤어짐을 예고하고 있음을 알았음에도

혹시, 그날 기억나? 우리 헤어지기 며칠 전에 있잖아, 내가 뒤풀이 마치곤 잔뜩 취해서 기차역까지 버스 타고 갔었던 날. 너한텐 그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버려서 기차역에 내린 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어. 널 보러 가려고 그랬어. 그렇게 잔뜩 취해선 꾹꾹 누르던 마음 하나만 붙잡고 기차역까지 갔었는데, 근데, 통장에 표를 끊을 만큼의 돈이 없더라. 아니, 딱 표 끊을 만큼의 돈만 있더라. 근데 그걸 써 버리면 내 생활비가 없더라. 당장 널 마주하고 커피 한 잔 할 돈도 없더라. 그래서 취한 걸 핑계로 울면서 간 기차역에서 다시 뒤돌아섰어. 취기를 핑계 삼아 네가 너무 보고픈 마음을 겨우 꺼내 들고 가 놓곤, 다시 꾸역꾸역 욱여넣었어.

아, 분명 다채로운 오늘이 잿빛이다. 세상이 잿빛임을 여실히 느끼는 내가 너무 밉다. 내게 다채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고자 매일을 노력한 엄마를 두고 세상을 잿빛이라 여기는 내가 너무 싫다. 네가 처음부터 없던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내 세상, 찬란하지 않아도 좋으니 적당히 컬러풀하기만 해도 되는데. 찬란하다 없어져 버리니 자꾸만 눈앞이 흐려져 잿빛이 되잖아. 너만 컬러로 보이는 흑백 세상에 너 없이 혼자 남은 것 같다. 나조차도 흑백인 채로.



엄마가 요즘 보시는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너랑 닮았다며 나를 자꾸 거실로 부르신다. 아니야, 닮은 모습 보고 싶지 않아. 너랑 닮은 건 흔들려 떨어지는 나뭇잎 한 점까지도 보고 싶지 않아. 라고 되뇌이며 바쁜 척 방에 앉아 있었다. 실제로 바쁘기도 했다. 오늘 마감해야 하는 원고가 내겐 있었고, 서두르지 않으면 짧아지는 건 내 수면 시간이었으니까. 그렇게 부름에 응답하지 않기를 몇 날 며칠, 드디어 궁금증이 내 다짐을 이겨 버렸다. 나 사실, 너랑 닮은 건 뭐든 보고 싶었다. 네 머리칼 끝자락이라도 닮은 게 있다면 한참을 보고팠다.


진짜 닮긴 했더라. 얼굴 자체가 닮았다기보단, 뭐랄까, 전체적인 느낌이 네가 살아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형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잠깐 구경만 해야지 하고 나갔다가 한참을 드라마를 보다 방에 들어왔다. 살아 움직이는 너를 보는 것만 같은 거야. 내가 하루 온종일 그리워하는 존재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만 같은 거야. 그러곤 다시 방에 들어와 책상에 앉아 일을 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더라.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이는 너를 보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정말 간만에 사진첩을 열었다. 너랑 같이 찍은 사진들, 네 사진들은 모두 보안 폴더 속에 잠가버렸는데, 딱 하나 못 잠그고 그대로 갤러리에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 딱 하나 있거든. 회사 사람들 다섯이서 처음으로 술 마신 날 다 같이 찍은 인생네컷. 우리가 아직 사귀고 있지 않을 때의 사진. 사귈 때 사진은 도무지 보기가 힘들어서 딱 이 사진만 사진첩에 그대로 두었다. 네컷 사진을 찍으면 큐알 코드로 제공되는, 영상도 같이 다운로드할 수 있게끔 해 주는 시스템이 도통 무슨 쓸모인가- 생각했던 지난날들이 있었는데, 이럴 때 유용하라고 있는 거였나 보다. 이게 아니었음 널 담은 영상은 하나도 없었을 거니까.


근데, 널 보려고 연 영상인데 자꾸 내가 눈에 밟히더라. 널 한참 보다가, 그다음엔 나를 한참 봤다. 이때도 널 신경 쓰고 있구나, 네 옆에 설 때면 긴장하고 있구나, 그런 게 다 보이더라고. 그리고, 참 행복해 보이는구나, 싶어서. 그때 다 같이 사진 찍다가 네가 내 손 스친 거 알아? 살짝 잡은 것 같기도 했었었는데, 일부로였어? 그 순간 확 긴장하는 게 영상 속 내 표정에 너무 여실히 드러나서 좀 웃겼어. 내가 잃지 못하는 건 네가 아니라 널 좋아한 나 자신인 걸까? 그런 나를 보면서 마음이 너무 쓰린 거 있지.


근데 있잖아, 그러다 추억팔이에 푹 빠져 버려 서랍 속 앨범을 꺼내 너랑 찍은 인생네컷을 봤는데, 5월의 네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더라. 우리 헤어지기 딱 한 달 전의 네가 별로 행복해 보이지가 않더라. 우리 마지막으로 봤을 때 말이야, 광안리에서 찍은 네컷사진, 그 속의 네가 별로 기뻐 보이지가 않더라. 다른 사진들 속에서의 너는 나처럼 참 빛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날 찍은 사진은 그렇지가 않더라. 아, 네 마음은 꽤 오래전부터 홀로 정리 중이었구나, 나한테 말하기 한참 전부터 혼자 하나하나 담아 나가고 있었구나, 그걸 깨달아 버렸어. 왜 몰랐을까? 아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외면했던 것 같아. 모른 척했던 것 같아. 그리고, 진짜로 모르고 싶었던 것 같아. 힘들어하고, 멀어져 가고 있었던 널 내가 외면했어.


이렇게 한 번씩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나마 내가 찾은 방법이 이렇게 구구절절, 현악적인 척, 문학적인 척, 갖은 척을 잔뜩 하며 미련 뚝뚝 담은 글을 써내려가는 건데, 아무리 키보드를 두드리고 두드려도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 내가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영, 평생 너한테 혼자 건네는 독백일 것을. 아무리 아무리 길고 긴 이야기를 담아도 너는 영영 모를 마음일 것을.


네게 좀 더 진중했어야 했다. 날 좋아하니까 봐주겠지, 이해해 주겠지 그렇게 넘어가질 말았어야 했어. 내 인생에 갑자기 생긴 변수에 대해 좀 더 많이 이야기하고, 사과하고, 우리에 대해 더 많이 나눴어야 했어. 근데 그러기엔 내 상황이 녹록지 않았어서, 미처 옆자리의 날 보낸 네 마음까지 내가 제대로 돌아보질 못했었어. 그래서 그냥, 모른다, 그냥이다, 모른다, 이런 말만 자꾸 반복했어. 그게 너무너무 미안해. 너랑 매일 정해진 시계처럼 전화를 하면서도 그런 것들 어느 하나 제대로 말하지 못해서 너무너무 미안해.


네 이름이 너무너무 부르고 싶다. 더 많이 부를 걸 그랬어. 5월 중순의 어느 날, 그날이 우리 보는 마지막 날인 줄 알았다면 아침에 너한테 칭얼대지 말걸. 더 많이 웃을걸. 한 시간만 늦게 가라고 할걸. 밥 한 끼만 더 먹자고 할걸. 얼굴 한 번만 더 마주할걸. 눈 한 번만 더 마주칠걸. 손 한 번만 더 잡아볼걸. 한 번만 더 안아볼걸. 사진 한 장만 더 찍자고 할걸.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한번 더 말해줄걸. 미친 척하고 네가 타는 기차 타고 같이 따라 올라가 보기라도 할걸.


6월 중순의 어느 날, 그날이 우리 마지막으로 연락하는 날인 줄 알았으면 나 아픈 거 안 물어봐 줘서 서운하다고 너한테 칭얼대지 않았을 거야. 혹시, 그날 기억나? 우리 헤어지기 며칠 전에 있잖아, 내가 뒤풀이 마치곤 잔뜩 취해서 기차역까지 버스 타고 갔었던 날. 너한텐 그저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버려서 기차역에 내린 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어. 널 보러 가려고 그랬어. 그렇게 잔뜩 취해선 꾹꾹 누르던 마음 하나만 붙잡고 기차역까지 갔었는데, 근데, 통장에 표를 끊을 만큼의 돈이 없더라. 아니, 딱 표 끊을 만큼의 돈만 있더라. 근데 그걸 써 버리면 내 생활비가 없더라. 당장 널 마주하고 커피 한 잔 할 돈도 없더라. 그래서 취한 걸 핑계로 울면서 간 기차역에서 다시 뒤돌아섰어. 취기를 핑계 삼아 네가 너무 보고픈 마음을 겨우 꺼내 들고 가 놓곤, 다시 꾸역꾸역 욱여넣었어.


웃기지.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먹은 걸 다 토해낼 정도로, 앞이 핑핑 돌 정도로 취한 내가 통장 잔고 확인을 하고 있더라. 진짜 웃기지. 그 때라도 널 보러 갔었으면 우리 헤어지지 않았을까? 좀 더 늦게 헤어졌을까? 그날 갈걸. 생활비고 뭐고, 아무것도 재지 말고 일단 보러 갈걸. 네가 심심하단 말 뒤에 이 거리가 힘들고 버겁단 말을 숨기고 있다는 걸 다 알았었는데, 지금이 아니면 우리 앞으로 잘못될 것 같다는 것도, 널 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부서지기 직전이었단 것도 다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못 갔어.


너 있잖아, 왜, 마지막 우리 봤을 때,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어 달라고 한 거야? 원래 그러지 않았었잖아. 사진 찍히는 거 좋아하는구나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땐 유독 좀 심했어. 혹시 그때부터 마음을 정했던 거였어? 그래서 네 흔적을 내 갤러리에 잔뜩 남겨둔 거야? 왜, 왜 떠날 거면서 그렇게 사진만 많이 남겨? 내가 죽은 사람 그리워하는 것도 아닌데. 만날 수도 없는 사람, 내 곁을 떠난 사람 사진만 잔뜩 있어선 어디다가 쓰라고. 지우지도, 보지도 못하는 애물단지 같은 사진을 도대체 어디에 쓰라고.


사람들은 참 대단한 것 같아. 내가 유난 떠는 걸까? 고작 나 싫다고 떠난 남자 하나에 이렇게까지 연연하는 내가 너무나도 멍청한 걸까? 네가 내 첫 이별이라 그래. 내가 인생에서 맞이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이별이라서 그래. 다들 어떻게 이런 마음을 잘 달고, 묻은 채 살아가는 걸까. 물론 나도 대외적으로는 잘하고 있어. 사람들은 몰라. 내가 이렇게 힘든지. 친구들한테도 얘기 안 해. 내내 같은 얘기만 해 대면 얼마나 질리겠어. 두 달이 채 지났으니 다들 잊은 줄 알아. 다들 그렇게 대외적으로 마음을 꾸민 채 살아가는 걸까? 진짜 마음은 이렇게 매번 무너지고, 부서지면서도?


상처가 아물면 새 살이 돋고, 계속 상처가 나면 그 부위에 굳은살이 생기듯 마음도 언젠간 그렇게 되겠지? 단지 내 예상보다 소요 시간이 좀 긴 것뿐이겠지? 좀 뻔한 말이지만, 뻔한 말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시간이 약이라는 말만 믿어야겠지?


시간이 약이라면 제발 활대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가 줬음 좋겠다. 매일같이 나 자신을 다잡는 일을 더 할 자신이 없다. 요샌 내 방 캐비넷 안에 숨겨둔 소주 한 병과 소주잔이 내 유일한 위안이야. 언제든 진짜 못 버티겠을 때면 한두 잔 마시고 잠을 청해야지, 그렇게 부적처럼 캐비넷에 넣어두고 있어. 진짜로 마시면 하도 울어대서, 그게 무서워 마실 엄두도 잘 못 내면서, 그렇게 부적처럼 넣어만 두고 있어. 술도 너랑 마셔야 맛있는 거였는데.


아, 분명 다채로운 오늘이 잿빛이다. 세상이 잿빛임을 여실히 느끼는 내가 너무 밉다. 내게 다채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고자 매일을 노력한 엄마를 두고 세상을 잿빛이라 여기는 내가 너무 싫다. 네가 처음부터 없던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내 세상, 찬란하지 않아도 좋으니 적당히 컬러풀하기만 해도 되는데. 찬란하다 없어져 버리니 자꾸만 눈앞이 흐려져 잿빛이 되잖아. 너만 컬러로 보이는 흑백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다. 나조차도 흑백인 채로.

이전 04화 스물다섯 살이 부르는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