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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의 정현 Sep 02. 2024

스물다섯 살이 부르는 엄마

엄마, 세상이 너무 시끄러운데 어떡해?

엄마, 그런 거 있잖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삶에 소소한 위안을 주는 것들. 따뜻한 커피, 잔잔한 음악, 틈틈이 보는 드라마, 그런 것들이 제겐 항상 위안이었는데요. 지금은 커피도 맛이 안 나고, 음악은 시끄럽고, 드라마는 보기조차 버거워요. 그럼 이제 난 어떡해.



"나라가 인정한 유일한 마약, 음악." 이란 말을 아는가.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다 함께 즐기며 어우러질 때에도, 나 홀로 쓸쓸함을 만끽할 때에도 늘 우리 곁에 함께하는 음악. 드라마가 드라마틱한 이유는 매 장면마다 적절한 배경음악이 깔려서라 했다. 그토록 음악은 늘 거부감이 없는 존재였다. 이 세상엔 무수히 많은 음악들이 있고, 그중 하나는 반드시 내가 필요한 순간에 척 하고 들어맞았더랬다.


그런데,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 같을 때에는 뭘 들어야 할까? 요즘은 마음이 너무 시끄러워서 부러 쿵쾅거리고 시끄러운 사운드의 음악만 골라 들었었다. 그렇게라도 하면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고, 엉키고 설킨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근데, 이제 아무것도 듣고 싶지가 않다. 듣지를 못 하겠다. 노래 하나하나가 너무 시끄럽고, 지나가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날카로울만치 밝다. 거리를 거니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이 지금의 나에겐 큰 자극으로 다가온다.


이젠 내가 무엇으로 무너지는 지조차 잘 모르겠다. 이게 정말 너 하나 때문에 그럴까? 그런 걸까? 고작 너 하나로 무너다니, 내가 너무 나약한 것 아닌가. 강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내 마음의 힘이 너무 가벼운가 보다. 나름 나이를 먹었다고, 어른이 되었다고 남자는 자기 멋대로 만나 놓고, 결국 무너지는 마음을 버티지 못해 엄마를 부른다. 나 혼자서. 마음속으로, 불러 삼킨다. 고작 이런 걸로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딸로 보이긴 싫어서. 당신이 삶을 바쳐 키운 사람이 이렇게 쉽게 부서지는 사람임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오늘은 퇴근길에 집에 참 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나 지금 되게 안 괜찮은데, 집에 가면 또 괜찮은 척을 해야 해서 그게 버거웠다. 씹어도 별 맛이 느껴지지도 않는 밥을 멀쩡한 척 먹어야 하는 게 싫었다. 나는 이 무너진 마음을 어디다 꺼내 놓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또 들었다. 엄마의 무너진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엄마도 사람인데, 무너지고 부서지지 않았을 리 없는데, 그 마음은 어디에서 다시 주워 붙인 걸까.


그럼 나도 집에 가야지. 밥에서 아무 맛이 안 나도, 이를 먹게끔 해 주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해야지. 나도 혼자 조각조각 잘 주워다 붙여야지 뭐. 근데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으니까, 어디 구석에 잘 처박아 놔 보지 뭐. "엄마, 나 좀 도와줘. 나 너무 힘들어.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이 말은 끝끝내 내뱉지 못하겠다. 내가 지금 나 자신을 사무치게 미워하는 중이라고, 내가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작은 소리 하나하나가 다 시끄럽다고, 아무 노래도 들을 수가 없어서 요즘은 이어폰을 귀마개로 쓰고 있다고, 귀에 꽂은 채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고, 거리의 소음이 토악질나게 버겁다고 말하지 말아야겠다.


아, 근데 엄마, 어떻게 고작 네 달짜리 연의 부재가 이렇게까지 날 할퀼 수 있는 거지. 세상엔 이정표가 되는 인연이 있다고 했다. 네가 내 이정표는 확실히 되었던 것 같다. 이정표 덕에 방향은 바뀌었는데, 남은 길은 나 혼자 걸어가야 해서 그런 건가, 네가 제시해 준 방향을 가면서 나 혼자여야 해서 그런 건가. 그럼 혹시, 외롭고 추워도 이 이정표대로 쭉, 바르게 쭉 따라 살아가다 보면 너랑 다시 닿을 수 있는 날이 있는 걸까.


엄마, 그런 거 있잖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삶에 소소한 위안을 주는 것들. 따뜻한 커피, 잔잔한 음악, 틈틈이 보는 드라마, 그런 것들이 제겐 항상 위안이었는데요. 지금은 커피도 맛이 안 나고, 음악은 시끄럽고, 드라마는 보기조차 버거워요. 그럼 이제 난 어떡해. 아무리 바쁘고 숨이 차도 의미가 되어 준 것들에서 아무 향도 아무 소리도 맡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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