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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의 정현 Sep 01. 2024

나랑 같이 바보가 될 수 있는 사람

네가 없는 세상이 별로 살아가고 싶지가 않아

너는 내 이상형이었다. 똑똑한데, 나랑 함께라면 바보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게 서로에게 우습지 않을 수 있는 사람. 네가 딱 그랬다. 너랑 같이 있으면 행복한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너랑 나는 같이 있으면 참 바보 같았다. 좀 멍청한 짓도 서슴없이 했다. 그게 참 좋았다. 그래서 오늘이 안 살만한가 보다. 함께 바보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려서.



우리 헤어지는 날 네가 나한테 그랬었다. "내가 없으면 죽을 거야? 그런 거 아니잖아." 그치. 아니지. 잘 살아갈 거지.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일도 하고, 그렇게 잘 살아가겠지. 그래서 내가 너한테 그랬잖아. "그건 아니지만, 참 팍팍할 것 같아." 그렇게 답했지. 근데 있잖아. 생각보다 더 팍팍해. 아주 팍팍하다 못해 쩍쩍 갈라지고, 갈라지다 못해 부서져 가루가 돼.


진짜 솔직히 얘기하면 있잖아. 솔직히 죽고 싶진 않아. 내가 왜 죽어? 나한텐 너보다 훨씬 훨씬 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고, 앞으로 창창하게 살아갈 나날들이 구만리야. 너 말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거고, 더 행복해질 날들도 무수히 많을 거야. 그래서 나는 언제까지나 잘 살아갈 거야. 근데, 그냥 오늘이 너무 살고 싶지가 않아. 뭘 먹고 싶지도 않고, 먹어 봤자 소화도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해 죽겠어. 근데 소화가 안 되면 또 네 생각이 난다? 웃기지. 네가 나랑 같이 춰 줬던 소화의 춤. 그때 그 순간이 숨 막히게 그리워.


웃기지. 나 지금 호강에 넘쳐서 요강에 턱걸이하고 있는 것 같지. 아주 웃겨. 삶이 지금보다 더 팍팍해져 봐야 정신 차리겠어. 널 그리워할 한 틈의 여유조차 없으면 네 생각조차 못 할 텐데, 아주 그냥 호강이 넘쳐흘러서 하루종일 너만 그리고 있는 거야. 일을 해도, 잠을 자도, 길을 걸어도, 모든 순간에 다.


내가 널 사랑했었는데, 너 때문에 내가 망가져가고 있어. 어떡해? 아니지, 사실은, 내가 나를 망치고 있는 거지. 넌 이미 매몰차게 날 버렸는데, 그걸 알면서도 세상 미련스럽게 널 놓지 못하는 나 자신이 나를 망가뜨리고 있는 거지. 너를 그리느라 사라져 버린 여유 때문에 자꾸만 날카로운 사람이 돼.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 안 할 말들을 하게 돼. 주변 사람들에게,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 주게 돼. 네가 좋아했던 내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진짜 웃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좋아할 내 모습을 그리고 있는 나 자신이 참 가엽고 웃겨.


너는 내 이상형이었어. 사람들이 나한테 이상형을 물을 때마다 나는 늘 없다고 답했었는데, 아니면 대충 사람들이 이해할 만한 이상형으로 대답했었는데, 근데 있잖아, 사실 진짜 이상형이 딱 하나 있었다? 똑똑한데, 나랑 함께라면 바보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게 서로에게 우습지 않을 수 있는 사람. 네가 딱 그랬어. 너랑 같이 있으면 행복한 바보가 되는 것 같았어. 너랑 나는 같이 있으면 참 바보 같았어. 좀 멍청한 짓도 서슴없이 했어. 그게 참 좋았어. 그래서 오늘이 안 살만한가 보다. 함께 바보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려서. 사실 바보가 제일 행복한 건데, 같이 바보 해줄 사람이 없어서. 나만 바보면 그건 자칫 좀 비참해지거든. 함께여야 즐거운 건데.


네 이름이 부르고 싶다. 네 눈을 보면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싶다. 널 보면서 바보같이 웃고 싶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진짜 바보 같고 멍청한 짓 좀 그만하고 싶다. 널 그만 그리워하고 싶다. 함께 바보이다가 나 혼자 바보로 남으니 그냥 나만 등신인 게 됐다. 제대로 바보가 됐다. 아, 나 혼자 바보로 남으니 너무너무 비참하다. 차라리 너랑 함께일 때에도 좀 깍쟁이일걸. 그럼 지금의 내가 이렇게 등신 같진 않았을 것 같은데.


이 찬란하고 빠른 세상에서 나만 바보인 것 같다. 함께할 바보가 없다. 그게 너였는데. 너는 나랑 바보 하기 싫었나 보다. 나는 너랑 같이 바보여서 참 행복했는데. 너는 바보인 게 싫었나 보다. 그래서 날 떠났나 보다. 그래, 이해한다. 근데 어쩔 수 없이 난 여전히 바보다. 난 여전히 널 기다린다. 너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혹시나 우연히라도 다시 스쳐 지나갈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땐 좀 똑똑하게 굴어 볼게. 그땐 좀 더 똑똑한 사람이 되어 있을게. 그땐 너랑 같이 똑똑한 사람이 되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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