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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의 정현 Sep 04. 2024

네 근황에 기대어 박박 닦은 방바닥

무너질 때마다 다시 읽을 글

문득 정신이 차려졌다. 네게 두 번 베인 이후로 일주일간 청소하지 못했던 방바닥이 보였다. 널브러진 빨래들이 보였다. 널기만 하고 걷지 못해 먼지가 쌓여가는 옷들이 보였다. 개지 못 해 잔뜩 구겨진 이불이 보였다. 너와 전화하지 못하게 된 후로 단 한 번도 손대지 못해 하얗게 먼지가 쌓인 이어폰이 보였다. 다, 다 나 같았다. 그래서 곧장 물티슈를 꺼내 들곤 무작정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제발 내 마음도 닦이길 바라면서. 한 순간에 닦이는 먼지처럼 내 마음도 그러길 바라면서.



네가 날 두 번 차단한 그날, 내 목이 두 번째로 베였던 바로 그날, 시끌벅적한 세상의 소식을 접할 자신이 없어 인스타그램 계정을 비활성화했다. 한창 방황하는 사춘기 소녀 같은 짓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만큼 내 작은 마음속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내리치는 폭풍우를 쫄딱 맞은 도시의 처참한 뒷모습 같았다. 그런데,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카카오톡을 통해 내 안부를 물어보는 연락이 며칠간 종종 왔다.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안 보여서 연락했다고, 혹시 자신을 차단한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너는 나를 찾지 않다 못해 말끔히 지워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날 찾는 사람들이 남아있어서 결국 며칠 만에 계정을 다시 살렸다. 그런데, 잠들어 있던 계정이 활성화되는 과정에서 잠시 오류가 생겼던 건지, 네 계정이 눈에 띄었다. 헤어진 후 비활성화되어 있던 줄만 알았던 네 계정에 사진들이 즐비한 것이 잠깐 보였다 사라졌다.


아하, 내가 인스타그램을 잘 몰라서 착각했었구나. 계정을 비활성화했던 게 아니라 넌 인스타에서도 날 차단했던 거구나. 이 사실을 무려 두 달이나 지나 알게 된 내가 웃겼다. 아휴, 이젠 더 이상 베일 목도 없어서 그 사실이 그닥 상처로 다가오지 않았다. 상처도 입을 살이 남아 있어야 더 받지, 아주 너덜너덜하다 못해 구멍이 숭숭 뚫린 가슴팍에 무슨 상처를 더 받으랴.


찌질한 선택을 했다. 인스타그램은 똑똑해서 네가 날 차단했다면 내가 이 핸드폰에서 새로 생성하는 계정에서도 널 볼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시크릿 모드로 들어가 새로운 계정을 만들었다. 듀얼 메신저 기능을 활용해 인스타그램 앱을 하나 더 깔았다. 그랬더니 널 엿볼 수 있었다. 세상에, 우리 엄마가 이런 내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혀를 끌끌 차시련지. 늘 당당한 인생을 살길 바랬던 딸의 찌질한 면모가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지시련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근무 중이었는데도 홀린 듯이 계정을 만들고, 널 찾았다.


내가 모르던 네가 보였다. 10일 전에도, 20일 전에도, 한 달 전에도 네가 살아 있었다. 왜 최근 사진이 아니라 자꾸만 옛날 사진을 다시 올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음이 눈에 보여서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기뻤다. 최근 한 달 중 제일 기쁜 순간이었다. 위안이 됐다.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정말 다행히도 내 허상이, 허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잘 살펴보니 하려고 마음먹었던 일도 시작하고 있는 듯했다. 운동도 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의 이별이 네게 상처가 되었었는 지조차 난 이제 잘 모르겠지만, 물론 SNS에는 좋은 모습만 올리겠지만, 하루하루를 알차게 살아가는 듯해서 참 좋았다.


난 미친년인가, 조증이 왔나, 기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저녁 근무 내내 신이 나서 일하고, 떠들어댔다. 갑자기 소화도 잘 되고, 얼굴 만연에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가 살아 움직였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너랑 잠시 이어졌던 것 같았다. 어머, 진짜 미친 생각인데,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떡해. 그래도 기뻤다. 특히 네가 원하던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단 부분이 제일 신이 났던 것 같다. 난 진짜로 등신이었나 보다. 진심으로 네가 잘 살고 있길 바랬나 보다. 난 매일 하루하루를 어떻게 이고 가야 할지 몰라 헤매면서도 넌 그러지 않기를 바랬나 보다.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조증이 가라앉았는지, 간만에 갑자기 들떠버린 신경이 지쳤는지 오랜만에 미친 듯이 잠이 쏟아졌다. 한 시간 반 정도를 기절했다 일어났다. 문득 정신이 차려졌다. 네게 두 번 베인 이후로 일주일간 청소하지 못했던 방바닥이 보였다. 널브러진 빨래들이 보였다. 널기만 하고 걷지 못해 먼지가 쌓여가는 옷들이 보였다. 개지 못 해 잔뜩 구겨진 이불이 보였다. 너와 전화하지 못하게 된 후로 단 한 번도 손대지 못해 하얗게 먼지가 쌓인 이어폰이 보였다. 다, 다 나 같았다. 지금의 내가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먼지와 머리카락으로 점철된 방바닥도, 구겨진 빨래들도, 잔뜩 먼지 쌓인 이어폰도 다, 전부 다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곧장 물티슈를 꺼내 들곤 무작정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제발 내 마음도 닦이길 바라면서. 한 순간에 닦이는 먼지처럼 내 마음도 그러길 바라면서.


깨끗해진 방 안에 앉아 글을 쓴다. 안타깝게도 아직 먼지 쌓인 이어폰은 치우질 못 했다. 네 목소리를 전해 주던 유일한 친구를 서랍 속에 넣기엔 아직 내 서랍에 뭐가 너무 많은가 보다. 네가 잘 사니 나도 잘 살겠다. 네가 운동을 하니 나도 운동을 하겠다. 네가 네 일을 해 나가니 나도 내 일을 해 나가겠다. 네가 네 일을 사랑하니 나도 내 일을 사랑하겠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게 배우기만 한다. 내가 가르쳐 주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배워 가기만 한다. 도둑년이다. 날 떠난 네가 아직도 날 채우고 있다.


감히 못난 마음에 하나 바라자면, 네가 러닝 하는 그 길이 나와 통화하며 산책하던 길이었길. 땀 흘리며 뛰는 그 길의 한 발걸음에라도 나를 기억해 주길. 나와 전화하지 못하며 지나는 그 길이 한 순간 조금이라도 괴로웠길. 나처럼 들숨에 한 번, 날숨에 한 번 추억하긴 감히 바라지도 않으니 그 긴긴 달리기의 한 순간에라도 내가 담긴 적이 있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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