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그것도 건물 안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체험

by 앨리스

지난 5월, 남편 출장이 있어서 나도 같이 여행할 겸 싱가포르에 동행했다. 베트남과 가깝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싱가포르에 가 본 적 없었던 만큼 나는 싱가포르 여행을 엄청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여행 가기 직전 나는 베트남 환절기 (건기에서 우기로 넘어가는 시점)라 그랬는지 지독한 열감기와 목감기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 한여름의 날씨에 스카프와 마스크, 가디건까지 걸치고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올랐다.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공항의 넓은 공간감과 깨끗한 도로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한국의 공항과 길도 엄청나게 깨끗하고 좋지만 그건 내게 익숙한 곳이고, 여기는 베트남에서 살다가 바로 마주한 이웃 나라의 모습이라 그런가. 마치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다른 차원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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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미니언즈가 맞아주는 싱가포르

픽업 차를 타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길 위에서 경적소리도 안 나고, 오토바이도 거의 안 보이고, 차가 덜컹대지도 않고... 작은 것 하나하나 모든 게 다 다르게 느껴졌다.


짧지만 알찼던 싱가포르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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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 레고 미니피규어 시즌2 박스채로 구매하는 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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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유니버셜 스튜디오 가서 신나게 돌아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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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한 곳에서 쇼보다가 허겁지겁 제자리 찾아갔던 가든스 바이 더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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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마리나 베이 샌즈 쇼핑몰

남편이 출장 일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는 평범한 관광객 마인드로 싱가포르를 신나게 돌아다녔고, 쇼핑하고 맛있는 음식 먹느라 이 곳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는 못했었다.


싱가포르에서 길을 걷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내게 자유시간이 생겼다. 오래간만에 도시를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마음껏 걸어보자며 호기롭게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습관처럼 그랩을 부르려다가 가격보고 조용히 백스텝 했던 건 안 비밀...


IMG_8849.JPG 여기.. 미래도시인가요?

너무 오랜만에 걷는 거라 다리가 뻐근했지만 그래도 음악 들으며 길을 걷는 게 참 기분이 좋았다. 그러던 중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내 눈 앞에 있는 건물 하나를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싱가포르의 '파크로얄 온 피커링' 호텔이고 조경 때문에 공중정원 호텔로 불린다고도 했다.


매끈한 고층건물 중간에 초록색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모습이라니...


생각해보니 싱가포르에서 본 빌딩들은 조경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듯한 모습이었다. 더운 날씨라 사시사철 푸른 나무가 있는 환경이지만 회색빛 도시처럼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의도한 듯한 느낌이라 해야 하나.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싱가포르에서는 비슷한 외형의 건물이면 건축허가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쩐지 특이하게 생긴 건물들이 많더라...


베트남에서 짓는 아파트들 중에 '싱가포르 건설사'임을 강조하는 곳들이 있는데 왜 그런 건지 그제야 어렴풋이 감이 잡혔다. 그만큼 외관이 아름답고 조경에 신경을 쓴다는 이야기 아닐까 싶다. 실제로 베트남에서 본 싱가포르 건설사 아파트들 외관 디자인이 싱가포르 건물과 꽤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IMG_8847.JPG 보행자는 횡단보도로 길을 건넙니다

베트남에서는 횡단보도를 보기가 힘들다. 물론 호치민 시내 중심가에는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있지만 내가 사는 동네만 해도 제일 가까운 횡단보도가 어디 있는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다. 보행자용 신호가 있어도 오토바이들이 지나다니기 때문에 신호등만 보고 걸었다가는 위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싱가포르의 촘촘한 횡단보도가 반갑고 부러우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아 그냥 건너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


그새 베트남에 적응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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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문했던 싱가포르의 WeWork (두 지점의 사진이 섞여있음)

나는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 두 곳의 WeWork을 방문했다. 비싼 멤버십 가격 덕에 전 세계 WeWork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으니 그 장점을 마음껏 누려보자는 취지였다. 하나는 차이나타운 근처에 아기자기한 곳이었고 또 하나는 어마어마한 빌딩 숲 사이에 높은 건물에 위치한 곳이었다. 두 곳 모두 예약을 해 둔 덕에 이름만 얘기하니 바로 공용 공간을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놀라운 건 WeWork 안에 바리스타가 있어서 맛있는 플랫화이트를 내려줬다는 것! (호치민 WeWork 커피는 정말 맛이 없다. 베트남 커피 맛있는데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으니 제발 반성하길...) 또 전자레인지에 'Halal'과 'Non-Halal'이 구분돼 있어서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는 것도 체감할 아주 있었다.


네? 건물 안에 있는데 입구를 못 찾겠다고요?


3230f699e0105b7ff612c0abdf71a408.jpg 아니 대체 어디로 가라는 거야 (출처: 디즈니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두 번째 WeWork을 찾아갈 때 나는 도시라는 공간을 처음 만난 사람처럼 길을 잃었다. 열심히 지하철을 타서 WeWork이 있는 '선텍타워 5'에 도착했는데 건물 어디에서도 입구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거대한 몰 안의 작은 표지판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는데도 내게는 막다른 길, 아니면 다른 공간만이 나올 뿐. 마치 흰 토끼를 쫓는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오르락내리락 이 건물의 문이란 문은 전부 열어보고 리셉션에 전화까지 했는데도 찾지 못하다가... 몰 안에서 세그웨이를 타고 다니는 직원이 '아 지금 타워 5 입구 공사 중이야! 바닥에 그려진 발자국 따라가서 저 에스컬레이터 타고 2층 가서 엘리베이터 갈아타렴' (실화임)이라고 아주 친절하게 얘기해 준 덕분에 30분 만에 제대로 된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가라고...? 정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그러다가 WeWork에서 나올 때도 지하철 플랫폼 잘못 가서 다른 방향으로 탈 뻔한 그 순간 나는 현대인의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괴감이 들었다. 아니 지하철 그거 1년 안 타고 코엑스 같은 쇼핑몰 좀 안 다녔다고 해서 이렇게 길을 못 찾는다고? 내가 영어를 못 읽는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도 갖고 있고 구글맵이 알려준 대로 지하철 노선 색깔 보면서 따라갔는데, 여행 다닐 때 '길 잘 찾는다'는 평가를 줄곧 듣던 내가 싱가포르에서 그것도 실내에서 길을 잃다니.


그렇다, 인간은 정말 엄청난 적응의 동물이었다.


다 정해져 있으니 편하지 않니?


내가 싱가포르에서 가장 큰 문화충격을 느낀 건 작은 규칙 하나하나 다 정해져 있었다는 점이다. 원래 나도 규칙, 체계, 정확한 프로세스를 좋아하는 편이라 베트남에 사는 동안 이런 것들이 그리웠었는데 막상 싱가포르에서 촘촘한 규칙을 마주하니 '와 좋다!'라는 생각보다 순간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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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3대만 댈 수 있는 택시 정류장과 그랩 타는 곳 표지판

택시 정류장에 댈 수 있는 택시 수가 정해져 있어서 바닥에 그 자리까지 그려져 있다. (번호까지 써져 있는 게 진짜 대단...) 사진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또 사람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다니! 베트남이었으면 음... (말잇못) 그러면 저기 택시가 다 세워져 있으면 배회하던 택시는 '아 꽉 찼군'하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 건가, 줄이 저 끝까지 늘어져 있다고 해도? 아니면 제2의 대기장소가 따로 있는 걸까 하는 삐딱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리고 큰 건물 안에서 그랩을 켜면 거의 대부분 픽업 포인트(몇 층 무슨 길 방향까지 다 정해줌)가 정해져 있어서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일반 차 들어오는 곳과 그랩 차량 들어오는 곳도 구분돼 있어서 질서 정연. 나는 목적지만 입력하면 모든 게 물 흐르듯 진행됐다. 그 말을 바꿔 말하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또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입력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는 뜻이다. 기사들은 내게 전화나 메시지 없이도 내 마음을 읽은 것 마냥 약속한 장소에 정확히 나타났고, 말을 걸지도 않았고, 약속된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무인 자동차를 탄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이 모든 게 불편하다는 건 전혀 아니다. 내가 그리워하던 정돈된 도시, 빠르고 정확한 프로세스, 모두가 규칙을 지키는 곳, 약속은 높은 확률로 지켜지는 곳. 그런데 이상하게 답답하다.



IMG_8946.JPG 만화 속 도시에 들어온 것 같다

마음 한 구석이 복잡했지만 지금은 그곳에서 한 번쯤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한다면 베트남이 아니라 싱가포르에서 하고 싶다, 체계적인 도시에서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생각. 거기 살면 환장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환상.


만약 거기 산다면 정말 길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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