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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Sep 30. 2020

버스로 6시간, 달랏에서 유럽을 만나다

오랜만에 샌들 대신 운동화, 반팔티 대신 가디건에 트렌치코트

지난 7월 말, 베트남에서 코로나19 지역감염이 3달간 발생하지 않았을 무렵 달랏에 다녀왔다. 그때만 해도 내수 경기 활성화를 위해 베트남에서는 국내 여행을 장려하고 있었고, 학교 방학이라 달랏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렸던 시기였다. 하지만 달랏 여행을 마무리할 즈음 다낭에서 다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고 지역감염이 시작되면서 베트남에 코로나19 2차 웨이브가 찾아왔다. 


베트남에 코로나19 지역감염이 잠잠해지면서 어디라도 잠깐 다녀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지 한참 고민하다 선택한 곳은 예전에도 다녀온 적 있는 달랏. 하지만 이번에는 비행기가 아니라 버스를 타고 가보기로 했다. 비용도 저렴하고, 편하게 누워서 갈 수 있고, 버스 터미널이 집과 가까워서 선택! 대신 돌아올 때는 바로 코딩 수업을 가야 해서 비행기로 왔다.


<2018년에 다녀온 달랏>


버스 타는 그 시간부터 여행이 시작되었다


소박한 버스 승차권과 터미널

베트남에도 vexere (베쎄레: 베트남어로는 저렴한 차표라는 뜻. 어감이 귀엽다)라는 통합 버스 예약 플랫폼이 있지만 내가 타고 싶은 운수회사의 캐빈 버스는 그곳에서 티켓을 구매할 수 없어서 무려 페이스북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내서 예약했다. 다행히 간단한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고, 기본적인 정보만 알려주고 예약 끝. 


약속한 출발일 새벽부터 전화가 와서 '정말 오는 거니?'하고 확인한다. 예약한 출발 시간 30분 전에 오라고 해서 허겁지겁 달려갔으나 우리가 타는 곳은 중간 기착지였고, 표에 나와있는 시간은 종점에서 출발하는 시간이었다는 점. 이러면 예약할 때 미리 말을 해주지.... 결국 30분이 아니라 1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신발 벗고 타는 신개념 버스, 버스계의 퍼스트 클래스

우리가 타는 버스는 앉아서 타는 버스가 아니라 1인 1실(?) 캡슐 호텔처럼 칸이 나눠져 있는 캐빈 버스였다. 완전히 누워서 버스를 탈 수 있다니....! 버스가 도착하면 기사님이 나눠주는 비닐봉지에 신발을 담고 맨발로 버스에 오른다. 가끔 베트남 슬리핑 버스에서 바퀴벌레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양말에 담요까지 꽁꽁 챙겼지만 일반 슬리핑 버스보다 비싼 캐빈 버스는 의외로 깔끔했다. 


달랏으로 가는 길, 베트남의 색감


시트는 180도로 눕힐 수 있고, 커튼과 창문 블라인드 내리면 100% 빛 차단 가능! 중요한 건 버스에서 라디오나 음악 안 틀고 버스 안에 사람도 많지 않아서 (좌석이 20개 미만) 조용히 자면서 갈 수 있다. 자리마다 충전 포트 있고, 심심하면 블라인드 걷어서 바깥 풍경 보고, 약간 좀 쑤실만하다 싶으면 휴게소에 들러주니 몸도 풀고. 베트남 살면서 내가 많이 험블해졌지만 이 버스는 정말 퍼스트 클래스 탄 기분이었다.


비행기 타는 것도 여행의 설렘을 주지만 호치민의 공항은 사람이 워낙 많고 복잡해서 공항에 가는 것부터가 스트레스다. 게다가 비행기 연착은 없으면 서운한 정도라 여행 시작도 전에 이미 지쳐버리는 경우가 대부분. 버스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자리가 편해서였는지 느긋하게 간식 먹고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바깥 풍경을 보니 이 시간부터가 여행이구나 싶었다. 차츰차츰 여행의 즐거움이 고조되는 기분! 


이쯤 하면 달리는 캡슐호텔


<버스 정보>

운수회사: Thanh Buoi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xethanhbuoi

가격: 1인당 34만 동 (약 1만 7천 원)

탑승한 곳: 630 Dien Bien Phu Street, 22 Ward, District Binh Thanh (빈탄 군 Pearl Plaza 맞은편) 


쌀쌀한 가을날 유럽 별장에 온 느낌


쉬엄쉬엄 6시간을 달려 도착한 달랏. 쌀쌀할 거라 생각했지만 확실히 호치민과는 날씨가 달랐다. 샌들 대신 운동화, 반바지 대신 긴 바지에 가디건, 트렌치코트를 입을 수 있는 날씨다. 오랜만에 옷을 껴입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내가 예약한 버스 회사는 호텔까지 무료로 데려다줘서 정말 편하게 체크인까지 끝. 아침 8시 반에 버스를 탔고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쯤. 느긋하게 달랏 여행하기 딱 좋은 스케줄이다. 


노란 색감이 인상적인 달랏의 호텔

예전에 달랏 여행할 때 갔던 호텔은 모던한 분위기에 시내와 좀 떨어진 곳이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시내와 가깝지만 고전적인 느낌이 나는 호텔을 예약해봤다. 실제로 1920~30년 대에 지어졌다고 하니 거의 100년이 된 집. 우리가 도착한 날은 흐리기도 하고 가끔 보슬비가 내리는 쌀쌀한 날이라 미리 영국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나무 창틀, 스탠드, 라디에이터
냉온수 나눠진 수전, 추워서 들어갈 시도도 못했던 욕조

내가 사는 호치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분위기. 삐걱대는 나무 바닥과 창틀에 천으로 된 블라인드, 냉온수가 나눠진 수전과 라디에이터. 일 년 내내 맨발에 반팔 반바지만 입던 나는 달랏의 쌀쌀한 공기가 좋으면서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우리가 묵은 호텔은 100년 전에 지어졌다는 명성답게 외풍이 있는 편이라 손끝 발끝이 쉽게 차가워졌고, 우리는 틈 날 때마다 포트에 물을 데워 따뜻한 차를 마셨다. 정말 유럽 별장 온 기분이네! 


<숙소 정보> 

Ana Villas Dalat

https://goo.gl/maps/X7TqGBAQQu9ZQSZL9


느긋하게 먹고 마시고 놀고


지난 달랏 여행은 날씨가 좋아서 이것저것 보러 다녔다면, 이번에는 중간중간 비가 많이 내려서 제약이 많았다. 하지만 그 나름의 운치가 있었고 우리는 천천히 달랏의 풍경을 눈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오토바이 빌려서 타고 다녔겠지만 가까우면 걷고 먼 거리는 택시 타고 다니는 것도 꽤 할 만했다는. 달랏은 비가 내리면 또 나름의 운치가 있는 곳이다. 


다녀온 곳 사진을 보니 호치민과는 색감부터 다른 느낌! 


아늑한 분위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테라로사가 생각났다
고즈넉한 정원이 아름다운 레스토랑
인증샷 100장 금방 찍는 예쁜 카페

달랏은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장 인기 좋은 여행지인데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맛집'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곳'이 훨씬 붐빈다. 우리도 현지인들 사이에서 유명하다는 카페에 한 곳에 가봤지만 여기가 카페인지 스튜디오인지... 잠시 용기를 내서 우리도 그들 사이에서 열심히 포즈를 취하고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그냥 평범하게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좀 화려하게 차려입고 올 걸.



베트남 여행하면 다들 휴양지를 떠올리곤 한다. 물론 바닷가에 최고급 럭셔리 리조트도 좋지만 호치민에 살다 보면 가끔은 쌀쌀한 공기가 그립다. 옷장에 일 년 내내 걸려만 있는 트렌치코트와 니트를 꺼내 입을 수 있는 여행지. 


오랜만에 만난 찬 공기가 이렇게 어색한데, 추운 곳에 가면 또 금방 적응하려나. 그때는 호치민의 햇살이 그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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