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앨리스 Jan 15. 2021

베트남에서 한국 입국, 자가격리로 시작한 2021년

그리고 서울 한 달 살이

드디어 우리의 14박 15일 자가격리가 끝났다. 베트남에서 이삿짐을 보내고, 임시 숙소에서 일주일 지내다 다시 서울의 한 달짜리 임시 집에 왔는데 그중 2주는 자가격리라 문 밖에 나갈 수 없었다. 이제 또 3주 뒤면 출국해야 하지만 우리 부부의 첫 서울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D+0 : 베트남에서 출국


호치민에서 인천 가는 비행기는 다행히 매일 있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보건소에 들를 생각을 해서 일부러 12월 30일 밤 비행기를 선택, 그래서 2020년 마지막 날부터 서울에 있게 됐다. 


고양이까지 캐리어 6개, 손에 든 가방 2개

아주 늦은 밤 비행기라 저녁까지 먹고 출발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원래 칠리 크랩을 맘껏 먹으려고 했지만 연말이라 모임이 많았는지 식당이 꽉 차서 그냥 근처 한식당에서 대충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국제선 공항에 가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였는지 그랩 기사가 정말 국제선 가는 거냐고 재차 확인했다. 


텅 빈 호치민 국제공항

이렇게 텅 빈 호치민 국제공항은 처음 봤다. 원래 입국 심사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출발 시간 기준 최소 3시간 전에는 와야 간신히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는데... 티켓팅 하는 과정에서 여권 스탬프까지 다 보는데 규정을 직원이 제대로 몰라서 실랑이하고, 또 고양이는 따로 태우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럼에도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수속 절차를 밟을 수 있다. 대신 사람이 너무 없어서인지 모든 출국자들의 지갑을 다 열어보더라는 사실... 물론 내 지갑에는 1동도 없었다. (후후) (* 베트남 나갈 때 반출 가능한 금액이 정해져 있어서 짐 검사할 때 재수 없으면 지갑도 확인한다.)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면세 구역으로 입장했지만 당연히 할 건 없고, 그냥 앉아서 탑승 시간만 기다렸다. 공항에는 아무 방송도 나오지 않고, 지연 없이 비행기에 타 보는 것도 처음이다. 


거의 비어있는 비행기, 그리고 굿바이 호치민

비행기에 탄 사람은 다 합쳐서 50명도 안 됐던 걸로 기억한다. 2-4-2 구조였는데 가운데 자리는 거의 아무도 없고 대부분 창가에만 듬성듬성. 승무원 분들은 모두 방호복에 고글, 장갑까지 착용했고 승객들은 전원 마스크. 게다가 사람이 너무 없어서인가 마치 진공상태에 있는 것처럼 조용했다. 이렇게 적막이 흐르는 비행기라니... 게다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최신 영화에는 2019년 말에 개봉한 겨울왕국2가 있었다. 


비행시간은 정직하게 5시간. 드디어 1년 반 만에 인천 공항에 다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남긴 것처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검역 프로세스가 진행된다. 단계는 대략 5-6개 정도 있었는데, 체온 재고, 앱 설치한 거 확인받고, 자가격리 위치 확인하고, 전화번호 확인하고, 그다음 입국 심사를 거쳐야 짐을 찾으러 갈 수 있다. 한국인은 격리 통지서를 수기로 작성해서 나갈 수 있지만 외국인은 담당자 확인받고 출력한 걸 들고 다시 심사를 거쳐야 함. 착륙 시간이 새벽 6시였는데 검역 다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7시 정도였다. 


내가 예약한 방역 택시 기사님 오실 때까지 대기 장소에서 기다릴 수 있고, 택시 기사님 오시면 담당자분께 말씀드려야 비로소 공항을 빠져나갈 수 있다. 정말 철저한 검역 프로세스.... 많은 분들이 고생하고 계시는 게 느껴졌다. 

2020년 마지막 일출을 보며,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보건소

방역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우리는 2020년의 마지막 일출을 볼 수 있었고, 가장 먼저 보건소로 갔다. 보건소 오픈 시간은 9시였는데 우리는 8시 45분쯤 도착해서 줄 서서 기다림. 호치민에 살다가 영하의 기온에 밖에 서 있자니 정말 뇌까지 얼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 덕에 코로나 검사 아픈 것도 잊음... 


험난한 입국, 푹 쉬자

그 후 얼른 우리의 서울 숙소로 들어왔고 이제 깨끗하게 씻고 푹 쉬어야지 했는데 온수가 안 나온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관이 얼어버린 것. 하.... 호스트에게 이야기했지만 난 지금 자가격리 시작이라 누가 도와주러 올 수 없는 상황. 할 수 없이 직접 물을 끓여서 수건을 적시고 그걸 보일러 관에 잠깐 올려뒀더니 그제야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해결됐으니 정말 다행. 따뜻한 물에 씻고 나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격리일은 1월 1일부터


한 가지 포인트, 우리는 12월 31일 아침 7시에 입국, 9시에 바로 검사를 받아서 이 날부터 자가격리 1일 차로 인정해 주는 줄 알았지만 귀국일은 시간에 상관없이 자가격리 0일 차, 귀국일 포함 15일 차에 자가격리 해제다. ^^... 


D+1 ~ D+4 : 자가격리 세팅


본격 자가격리를 위해 우리는 식량을 잔뜩 주문했다. 베트남도 그렇고 한국도 배달이 워낙 잘되기는 하지만 우리는 배달 음식보다는 직접 해 먹는 걸 좋아해서 쿠팡 프레시에서 장을 왕창 봤다. 


온라인으로 장보기 좋은 세상

숙소에 간단한 소금, 후추만 있길래 간장에 미림(...)과 다진 마늘까지 주문. 간단하게 국이라도 끓이려면 이 정도는 기본... 그리고 새해 첫 날 시부모님이 직접 오셔서 떡국이랑 각종 반찬을 문 앞에 두고 가셨고, 의좋은 형제 이야기처럼 내 동생이 마켓 컬리를 왕창 보내줘서 하루 만에 숙소 냉장고가 가득 채워졌다. (실수로 파프리카 5kg 한 박스 사서 아직도 먹고 있다는 게 함정...)


식량이 가득가득


D+5 ~ D+12 : 슬슬 자가격리에 적응, 무서운 한파


자가격리도 역시 집밥
배달로 핫플레이스 투어

가족들이 반찬을 보내 준 이후부터는 음식 배달을 거의 안 하고 대부분 요리를 해 먹었다. 대신 아쉬우니까 커피나 디저트는 배달. 덕분에 근처 핫플레이스 탐방 완료! 


폭설과 한파

1월 6일쯤이었나 갑자기 눈이 엄청 오더니 날씨가 어마어마하게 추워졌다. 창문이 얼어서 잘 안 열리고 보일러를 잔뜩 올려도 공기가 서늘. 창문을 열어보니 눈이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여름 나라에 살다 온 우리는 영하 18도의 날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오히려 격리 중이라 안 나가서 다행이라는 생각... 게다가 우리는 첫날 이미 수도관이 얼었던 경험이 있어서 수도관을 지키는 데에 총력을 다했다. 이 날부터 2-3일 간 배달이 전부 멈췄는데 다행히 우리는 쌓아둔 식량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주방이 없는 곳에서 자가 격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여가시간에는 뜨개질하거나
운동하거나

다들 자가 격리하는 동안 뭐하냐고 묻지만 의외로 우리는 알찬 14일을 보냈다. 남편은 영국 시간 맞춰서 일하느라 저녁부터는 바쁘고, 나는 글 쓰거나 뜨개질하거나 운동하거나. 예상처럼 하루 종일 누워서 넷플릭스만 보지는 않았다. 자가 격리하는 와중에도 나름의 일정(?)이 있었다는 점.


D+13 : 새해 첫 외출, 해제 전 검사

원래 해외 입국자 대상 해제 전 검사는 의무가 아니었지만 작년 말부터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바뀌었다. 담당 공무원 분도 두세 번 전화해서 신신당부했고, 오전에 검사를 받아야 해제일 오전에 결과가 나온다고 하셨다. 다행히 보건소가 가까워서 산책 겸 걸어갈 수 있었다는 점. 추위도 한결 나아져서 여름 나라에서 온 우리도 걸을만했다. 


첫 번째 검사는 너무 추워서 아무 감각이 없었다면 두 번째 검사는 왜인지 더 아프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빠지려고 했지만 한 번에 끝내야 다시 안 할 거 같아서 꾹 참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새해 첫 외출은 정말 감격스러웠다. 군데군데 얼어서 미끄럽긴 했지만 오래간만에 잘 정돈된 보도블록을 걷는 것도 좋고, 오랜만에 찬 공기도 기분 좋았다. 


D+14 : 음성 결과와 함께 자가격리 해제, 하지만 쓰레기와의 전쟁
만세

해제일 아침에 일어나니 와 있는 문자. 만세...!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이 날 정오에 자가격리가 해제되는데 유독 오전에 시간이 안 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해제 1시간 전쯤 담당 공무원 분이 전화로 음성 여부를 확인한 뒤 고생했다며 출소... 아니 자가격리 해제되어 나가도 좋다고 얘기해주셨다. 


하지만 우리가 2주 간 만들어 낸 쓰레기는 저녁 6시 이후에나 내보낼 수 있었다. 쓰레기 줄여본다고 배달음식도 거의 안 먹었는데 냉동실 한 칸은 음식물쓰레기로 꽉 찼고, 일반쓰레기와 재활용품도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나마 이 숙소에 자투리 베란다 공간이 있고 겨울이었기에 망정이지, 한여름이었다면 정말 엄청나게 고생할 뻔. 주황색 의료용 폐기물 봉투에 일반쓰레기와 음식물쓰레기를 모두 담아서 묶고 그걸 다시 50L 종량제 봉투로 묶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봉투가 무려 3개나 나왔다. (그나마 나눠준 의료용 폐기물 봉투 다 안 쓴 게 다행....) 


베트남 살 때는 분리수거를 안 해서 대충 버렸는데 한국에서는 그럴 수 없다. 일단 음식물 담겼던 플라스틱 용기는 깨끗하게 설거지한 다음 투명한 것과 아닌 것으로 구분하고, 물병은 라벨을 다 떼어내고, 박스 송장이랑 테이프도 전부 뜯어서 납작하게 만들었다. 자가 격리하는 동안 택배를 엄청 시켰더니 상자도 어마어마했다. 배달음식은 줄였지만 마켓 컬리에서 산 완제품 음식들은 비닐에 담겨서 또 플라스틱 포장이 돼 있었고, 가족들이 보내 준 햇반도 전부 플라스틱. 


격리 기간 동안 최대한 일회용품을 안 만들려고 배달 업체에는 일회용 수저를 주지 말라고 했고, 한 번 나온 일회용품은 재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수세미 받침대로 쓰거나, 고양이 물통으로 쓰거나 등등. 최대한 신경 썼는데도 쓰레기가 많이 나와서 죄책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가격리 한 번 할 때마다 다들 이럴 테니... 



자가격리는 해제되었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가서 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차가 없어서 멀리 나가기도 애매하고, 우리는 지금 여기 놀러 온 게 아니라 출장(....)처럼 해야 할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 남편은 저녁에 다시 일을 해야 하니 저녁 식사는 꼼짝없이 숙소에서 먹어야 하고, 아직 카페 취식이 안 되니까 낮에 업무 처리 말고는 딱히 나가 있을 곳도 없다. 


자가격리하는 동안 한국 시차(!)와 겨울에 적응하고, 아주 푹 쉬면서 재충전한 기분. 돈과 시간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가족들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다.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알차게 잘 쓰고 가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베트남에서 한국, 또 영국으로 고양이 수송 대작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