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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Feb 02. 2021

한 달짜리 서울살이 종료

코로나 검사로 시작해 코로나 검사로 끝났다

격리 해제 후 첫 외출한 날의 풍경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달. 2020년 마지막 날에 들어와 한 달을 보내고 두 번째 달의 첫 날인 오늘, 세 번째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평소라면 마음껏 즐기며 다녔을 테지만 또 다른 출국을 앞두고 너무나 바쁜 우리에게 서울 생활은 여행이 아니라 출장 같은 느낌이었다. 해야 할 일이 종류별로 쌓여있고 시간 단위로 task를 쳐내면서 보낸 3주. 어떤 순간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늘어지게 누워있던 자가격리 기간이 그립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자가격리 기간이 안 그래도 피곤한 국가 간 이동에 조금이나마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준 듯하다. 


여튼, 얼마나 정신없이 보냈냐면...

노션으로 to-do 리스트 관리 (일을 이렇게 했으면...)

처음에는 간단히 할 일들을 메모했는데 도저히 정리가 안돼서 정돈이 안 되는 걸 참을 수 없는 ESTJ인 내가 노션에 해야 할 일과 마감일을 정리했다. 어떤 건 마감을 맞춰야 하는 것도 있고, 어떤 건 동선 보면서 빈 시간에 끼워 맞춰야 하는 것도 있고, 어떤 건 온라인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하, 출국 이틀 전인 오늘에야 PCR 검사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짐만 싸면서 하루를 보냈다. 


운전면허증부터 각종 증명서 발급받기


영국에서는 영문 운전면허증만으로 운전할 수 있다!

격리 해제되자마자 가장 먼저 간 곳은 운전면허시험장이었다. 최근에 영문 운전면허증이 나와서 그걸로 재발급받기로 한 것. 나는 장롱면허지만 1종 보통 면허라서 그냥 바로 재발급 신청하기로 했고, 남편은 2종 보통이라 7년 무사고 경력 확인 후에 1종 보통 면허로 바꾼 다음 영문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다. 우리가 잘 계획을 세웠다면 이 모든 게 하루 안에 끝나야 정상인데 제대로 공부를 안 하고 와서 이리저리 스텝이 꼬이고 말았다. 


뒷면에 영어로 나와있음

영문 운전면허증은 국제 운전면허증과 다르게 별도로 주는 게 아니라 기존 운전면허증을 반납하고 새로 발급받는 것이기 때문에 내 남편처럼 면허를 2종에서 1종으로 바꿀 거라면 그걸 먼저 하고 영문으로 바꿔야 한다. (하... 결국 운전면허시험장 두 번 갔음) 


<운전면허 관련 TMI> 

* 영문 운전면허증은 경찰서에서 받으면 2주지만 운전면허시험장에서 하면 헬스장 회원권보다 빨리 나옴

* 각 나라마다 영문 운전면허증 인정해주는 기간이 다른데 영국은 1년까지고, 6개월 이상 거주해야 영국 면허증으로 교환할 수 있어서 6개월 이후 영국 면허증으로 교환받아야 함. 

* 우리가 기존에 알던 국제 운전면허증도 1년간 유효한데 1년 이내에 영국 외 다른 나라에 가서 운전까지 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신청하지 않음 

* 무사고 경력증명서는 외국에서 보험 가입할 때 필요한데 한국인은 온라인으로 가능, 외국인은 경찰서(....) 가서 하드카피로 발급받아야 함

* 2종 보통을 1종 보통으로 바꿀 때는 사진과 신체검사 절차가 필요함. 운전면허시험장에서 한큐에 해결 가능. 


운전면허증 외에도 우리는 온갖 증명서를 받거나 행정처리를 하러 동분서주 관공서 투어를 다녔다. 요즘 세상이 아주 좋아져서 온라인으로 영문 가족관계 증명서를 뗄 수 있는데 그렇게 하려면 영문 이름이 시스템에 등록되어 있어야 한다. 한국인이면 여권 정보를 자동으로 끌어오지만 외국인이라면 직접 구청 가서 등록해야 한다. 


그리고 해외 체류 기간이 일정 기간 이상이면 납부한 실비 보험금 일부를 환급받을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출입국 사실증명서가 필요하다. 앞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요즘은 온라인으로 다 되니까 한국인은 온라인으로, 외국인은 동사무소에서... 


또 고양이 ToR (Transfer of Residence) Form을 쓰면서 주소지 증명을 하라길래 영문으로 주민등록등본 뽑아야 해서 (지금 우리에게 프린터가 없어서 출력이 안됨, 다른 건 pdf로 저장됐는데 이것만큼은 안되더라) 동사무소 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필요 없는 서류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한국에서 행정처리가 워낙 빠르게 되기 때문에 찾아가는 시간이 1시간이면 그 자리에서 처리하는 건 5분을 넘기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기다리는 시간도 길지 않았다. 대한민국 만세...! 


아쉬운 만남들, 그리고 카페


이번 서울살이에서 가장 아쉬운 게 가족들, 친구들을 다 만나지 못한 점이다. 예전 같았으면 동네방네 나 한국 왔다고 말하고 약속 잡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이번에는 먼저 연락하기도 그렇고, 나도 PCR 테스트를 앞두고 있어서 온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있지 못하니 최대한 조용히 지냈다. 


카페 취식금지, 서서 벽보고 커피 마시기

우리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카페에서 커피를 못 마실 때라 이러다 정말 아무도 못 만나고 가는 건가 싶었지만, 격리 해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에 갈 수 있게 됐고 잠깐잠깐 지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대화하는 게 처음에만 어색했지, 어느 순간에는 마스크를 안 쓴 맨 얼굴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 시국에 영국이라니...

내가 예전에 어디에 썼는데 '이 시국에 영국에 가서 어떡하냐' 혹은 '왜 하필 영국이냐'는 말을 정말 오조오억 번 베트남에서부터 (심지어 유러피안한테도 들음) 들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들 우리를 걱정해서 그런 거고 정말 감사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그 얘기를 해서 약간 지치기도 한다.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죠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살러가는데 별 수 없다. 그냥 최선을 다해 아프지 않고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며 지내는 수밖에. 


서울의 카페

베트남에서도 카페 여행을 정말 좋아했는데 이번에 카페를 많이 못 다닌 것도 아쉽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 배달앱으로 커피 메뉴도 배달이 돼서 그 카페는 못 갔지만 메뉴는 즐길 수 있었다는 점. 간접적으로나마 아우어 베이커리, 타르틴, 카페 노티드 등 유명한 카페의 분위기를 느꼈다. 


서울에서 만난 영국과 베트남


앤틱 가구 거리
mind the gap

내가 머무는 곳은 이태원 앤틱 가구거리 근처인데 영국의 지명이나 브랜드명을 딴 상점이 많다. 게다가 영국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빈티지하고 앤틱한 가구와 소품이 가득. 어떤 날은 비가 스프레이처럼 내리길래 벌써 영국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직 영국 안 살아봄)


반가운 등불

또 조금만 더 가면 퀴논(실제 발음은 꾸이년 또는 뀌년에 가까울 듯..?) 거리도 있다. 용산구와 퀴논이 자매결연 한 지 20년 돼서 그 기념으로 거리를 조성한 거라고. 나도 퀴논 못 가봤는데...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다녀오지 못해 아쉽다. 언젠가 갈 기회가 있겠지?


서울에서 베트남을 만나니 괜스레 반갑더라. 제2의 고향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 시간이 지나 서울에서 영국을 만나면 또 반가운 마음이 들까? 


피해 갈 수 없는 코로나 검사


정신없이 3주를 보내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은 출국 전 해야 하는 코로나 검사. 그 고통(!)을 알기에 더욱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신없던 병원

아침 일찍 문 열자마자 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대기 인원이 꽤 있었다. 이 시국에 출국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하고 생각했지만 나도 출국하니까... 검사를 기다리는 사람은 연령, 성별, 국적 모두 다양했고 목적지도 달랐다. 놀라운 건 우리를 안내해 주는 직원이 외국인인데 한국어를 너무나 유창하게 했다는 점.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들어올 때 문진 하고, 접수하고, 검사 신청하고, 수납까지 끝내고 나서야 검사 장소로 갈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똑같은 말을 오조오억 번 했을 직원분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게다가 어떤 곳은 그 나라에서 지정한 양식에 맞게 건강증명서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 케이스를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 


지금 내 정신상태 feat 캐리어 7개


이제 내일 가서 증명서만 잘 챙기면 출국 준비는 마무리된다. 원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영국 들어가면 자가격리도 없고 (... 이게 더 무서움) 따로 준비할 서류도 없었는데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변하다 보니 우리도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 둘이 들고 갈 캐리어는 기내용 포함해서 7개. (이것도 무료 수화물이라 가능...) 아마 그중 하나는 마스크고, 나머지는 자가격리 때 혹시라도 배달 못 받을 경우에 대비해 먹을 식량, 그리고 가족 집에 남겨 둔 우리의 겨울 옷이 대부분이다. (베트남에 겨울 옷 없으니까 컨테이너에 싣지 못하고 들고 감) 


그 사이 좀 무게가 나가는 건 이미 택배로 보냈고, 고양이는 내일 에이전시에 인계돼서 하루를 보낸 뒤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타지만 만나지는 못한 채로 또 하루를 더 보낸 뒤에야 만날 수 있다. 




간만에 데이트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서울에 한 달 같이 살아보는 건데 여행하는 것처럼 지내지 못한 게 참 아쉽다. 물론 지난 한 달간 남의 집이지만 있는 재료로 맛있는 거 해 먹고, 고양이랑 빈둥거리고, 신나게 쇼핑하며 택배 뜯는 재미는 있었지만... 둘이서 좋은 레스토랑이라도 가자 했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내일도 아마 에너지 비축을 위해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을 가능성이 높지만, 진짜 마지막 관문을 향해 달려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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