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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초여름 날, 오슬로 걸어서 둘러보기

작고 조용하고 깨끗한 노르웨이의 수도

by 앨리스


[여행기를 시작하기 전에]
유럽 여행을 다 마치고서야 브런치에 들어왔다. 사실 매일 여행의 기록을 남기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서피스까지 짊어지고 갔지만,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관광객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 많고 또 시간을 내서 글을 쓰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게을렀다는 뜻이다. 힘들게 가져간 서피스는 우리 부부의 훌륭한 드라마 재생기가 돼 주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모스크바를 경유하고, 남편은 헬싱키를 경유해 오슬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예정대로라면 내가 남편보다 오슬로에 1시간 정도 늦게 도착하는 스케줄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에서 내가 타려는 비행기가 꽤 많이 지연된 데다가 노르웨이 입국 심사하는데 시간이 한참 걸려서 예상했던 도착시간보다 1시간 더 늦게 도착했다. 거의 20시간 만에 남편을 만났는데 둘 다 긴 비행시간에 엄청 지쳐있었다. 거기다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여름의 북유럽이라니...


20170615_213557.jpg 훤해보이지만 밤 9시 반, 오슬로의 백야


오슬로 공항은 출국하는 길에도 면세점이 있는데 우리나라 면세점과는 다르게 엄청 큰 마트 같은 느낌이다. 아니, 엄청 큰 술 창고 같기도 하다. 노르웨이는 술/담배에 매겨지는 세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보니 면세점을 그냥 지나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면세 술/담배 또한 인당 쿼터 가이드가 매우 엄격한 편이라서 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성에도 안 찰 듯. (노르웨이 면세 술/담배 구매 제한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보면 된다.)


wine_beer_tobacco.png 와인 4병, 맥주 작은 거 6개 1팩, 담배 200개피가 쿼터 끝. (이미지 출처: http://www.toll.no/en/)


친구가 부탁한 게 있어서 와인/맥주/담배를 가득 사들고 공항을 빠져나온 다음 시계를 봤더니 이미 10시가 넘어있었다. 우리는 티켓 자동판매기에서 NSB 기차 티켓을 산 다음 기차를 타고서 에어비앤비가 있는 nationaltheatre 역으로 향했다. (flytoget이라고 공항철도도 있지만 에어비앤비 호스트는 일반 기차가 조금 더 저렴하다며 이 방법을 추천했다.)


역에 도착했더니 놀랍게도 에어비앤비 호스트 부부가 플랫폼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껏 에어비앤비를 여러 번 이용했지만 호스트를 기차역에서 만난 건 처음이었다. 거기다 내 짐이 꽤 무거웠는데 호스트가 짐도 들어주고, 역에서 숙소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숙소까지 가는 길에 우리 부부가 비행기를 따로 타게 된 일, 오슬로에 오게 된 이유, 그다음 헬싱키 여행 계획까지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나눴다.


20170615_232614.jpg 우리가 지냈던 오슬로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하고 보니 숙소 위치는 nationaltheatre 역에서 5분 정도 거리였고, 방은 정말 깔끔했다. 첫날은 이렇게 숙소로 이동한 다음 짐을 풀고 정리했더니 금방 지나갔다.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오슬로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긴 팔 옷에 긴 바지를 입어도 살짝 쌀쌀한 정도의 날씨였다. 여하튼, 우리는 아침을 먹기 위해 오슬로 시청 근처에 있는 카페에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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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넓고 메뉴가 다양했으며, 분위기도 아늑하고 좋았다. 잠시 친구를 만나서 물건을 전해 준 다음 간단히 아침식사를 하는데 뭔가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오슬로에서 가게에 앉아 뭘 먹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8년 전에 나는 부모님 용돈 받아 생활하는 대학생이었고, 이 도시의 물가는 모두 알다시피 세계 최고였기 때문에 밖에서 뭘 사 먹는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금융위기로 원-크로네 환율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는 점. (2009년 당시 1 크로네는 200원 이상, 지금은 130원~140원 정도다. 참고로 500ml 물 한 병이 23 크로네이니 계산해보면 당시는 거의 5천 원, 지금은 3천 원 정도.) 그래서 대부분 식사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걸로 해결했었는데, 이제는 여유 있게 앉아서 커피와 빵을 사 먹다니! 참 별 거 아니지만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아침식사를 하고서 본격적으로 오슬로 시내 관광에 나섰다. 사실 이 도시가 크지 않기 때문에 느긋하게 걸어서 구경하기에도 충분하다. 8년 전에 봤던 풍경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다시 봐도 이 도시는 참 조용하고 깨끗하다.


# 오슬로 시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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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시청.PNG



# 노벨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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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센터.PNG


# 노르웨이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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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다 왼쪽은 2017년, 오른쪽은 2009년에 찍은 사진이다. 날씨가 화창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비 오는 날의 도시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의도했던 건 아닌데 셋 다 사진 구도가 다 똑같은 걸 보니 나는 참 창의력이 없는 것 같다. (...)



20170616_145207.jpg 거의 10년 만에 연필로 그림을 그려봤다.

우리는 전혀 시간에 쫓기지 않았기 때문에 여유 있게 이 도시를 즐겼다. 뭉크의 그림이 있는 내셔널 갤러리를 차근차근 둘러보기도 하고, 중간에 있는 크로키 방에서 그림도 그렸다. 종이에 사각사각 그림을 그려본 게 얼마만인지, 참 기분이 색달랐다.


20170616_154532.jpg 오후 4시의 러시아워

오슬로에서 만난 교통체증. 놀랍게도 저 사진을 찍은 시간이 오후 4시인데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많아서 길이 막히는 거였다. 오후 4시의 러시아워라니, 내게는 정말 생소한 개념이다.


20170616_191923.jpg 마트에서 장 봐서 저녁 해먹기, 그리고 무민!

저녁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학생 때처럼(!) 집에서 요리를 해 먹기로 했다. 숙소 부엌에 기본적인 건 다 갖춰져 있어서 요리하기가 편했다. 파스타 면이랑 소스, 햄이랑 파프리카만 넣어서 뚝딱뚝딱 요리 완성! 거기다 과일까지 야금야금 챙겨 먹었다.


식탁에 앉아 과일 먹으면서 서피스로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집에서의 일상을 오슬로로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가, 시차가 7시간이나 나는 낯선 곳에서의 생활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아, 백야의 불금 11시(놀랍게도 11시에도 해가 지지 않는다. 그리고 새벽 3-4시만 되면 다시 밝아지고.)에 창문 열고 시끄러운 EDM 음악을 틀어놓은 사람 때문에 바로 잠들기는 어려웠지만. 저 사람은 일 년에 몇 개월 안 되는 오슬로의 태양을 최대한 즐기기 위해 저러는 것이겠거니 하고 이해하기로 했다. 하지가 지나면, 오슬로의 낮은 눈에 띄게 짧아지기 시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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