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살아보는거야, 투르쿠에서 일상 그대로 즐기기
오슬로에서 헬싱키 가는 비행기가 매우 이른 아침 시간이었던 터라, 새벽에 눈 뜨자마자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아침도 못 먹고 정신없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새 헬싱키에 도착해 있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역시 무민샵이었다. 남편은 이미 오슬로 갈 때 헬싱키 공항에서 무민샵을 탐구했었지만 나에게는 이게 처음이었다. 이후 우리는 핀란드에서 끝도 없이 무민샵을 들락날락하면서 물건 값을 거의 외우게 되었다.
정신 차리고 짐을 찾으러 갔더니 정확히 우리 짐만 벨트에 남아있었다.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었나 싶은 생각과 함께 짐 찾아가라는 방송이나 안내가 없는 쿨한(?) 헬싱키 공항이 새삼 신기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헬싱키 시내가 아니라 헬싱키에서 기차로 2시간 넘게 가야 하는 '투르쿠'라는 도시였다. 투르쿠를 선택한 건 오로지 난탈리의 무민월드 때문인데, 헬싱키에서 무민월드를 당일치기하는 것보다 투르쿠에서 하루 자고 그다음 날 여유 있게 무민월드를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공항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기차 플랫폼에 내려가 보니 티켓 부스가 아닌 자동판매기에서 티켓을 구매해야 했고, 도착지를 '투르쿠'로 설정했더니 가장 빠른 티켓을 발권해 주었다. 다만 문제는 공항에서 투르쿠까지 직행 열차는 없어서 중간에 경유를 해야 했는데, 중간 기착지에서 투르쿠 가는 기차는 1시간 정도 뒤에나 탈 수 있는 스케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스럽거나, 마음이 조급해지지는 않았다.
이 날 정해진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투르쿠에 짐을 풀고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비행기로 헬싱키에 왔으니 시간도 꽤 여유가 있었다. 1시간 동안 투르쿠행 기차를 기다리면서, 우리 부부는 각자 이어폰을 끼고 밀린 드라마를 봤다. 역시 이번 여행은 '따로 또 같이'다.
투르쿠로 가는 기차는 정말 쾌적했다. 무려 2층 기차라서 (캐리어 들고 올라가기는 정말 힘들었지만) 좌석도 여유가 있었고, 좌석 간 간격도 좁지 않았다. 그리고 무료 와이파이에 충전기를 꽂을 수 있는 콘센트까지 있어서 웹 서핑하기에 최적이었다. 차창 밖 풍경도 2-30분 지나면 익숙해지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먼 여행객들에게는 이렇게 쾌적한 교통수단이 최고다. 기차에 앉아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모자란 수면을 보충하기도 했는데 매우 오랜만에 배낭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낑낑거리면서 큰 캐리어를 들고 기차를 타는 그런 여행 말이다.
2시간쯤 지나서 도착한 투르쿠 역은 플랫폼이 그렇게 많지 않은 작은 역이었다. 어쩌다 이 머나먼 나라에 와서, 또 이렇게 작은 도시에까지 오게 됐을까. 천상 게으른 우리를 이끈 것은 오롯이 '무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존재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 따로 찾아보니 투르쿠가 핀란드의 옛 수도였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잡은 숙소는 역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사실 하루 잠만 자면 되고, 이 도시에서 보낼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에 위치를 최우선적으로 생각했다. 기차역에서 두 세 블록쯤 걸어갔을까, 작은 아파트 건물이 나왔고 호스트의 안내에 따라 방에 들어섰다. 원룸이었지만 나름 알차게 있을 건 다 있었고, 둘이 하룻밤 지내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일단 짐을 풀고, 우리는 이 작은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다시 숙소를 나섰다.
무작정 걷다 보니 투르쿠의 번화가로 보이는 큰 길이 나왔다. 작은 광장과 맞닿아 있고, 근처에 백화점도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가 난탈리 가는 버스를 탈 곳이기도 했다.
우리가 투르쿠에 머물렀던 날은 날씨가 정말 쾌적했다. 덥지도 않고, 햇빛이 내리쬐니 산책하기에 매우 좋은 날이었다. 강변에 사람들이 여유롭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시끄럽거나 더럽지도 않고, 조용히 자연 속에 머무를 수 있는 그런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라 강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스톡만 백화점에서 간단하게 장을 본 다음 우리는 다시 숙소로 들어왔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느라 둘 다 꽤 지쳐있었는데, 바로 잠들기에는 아까운 그 정도의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건 드라마 시청이었다.
마침 숙소에 있는 TV가 스마트 TV여서 USB에 영상을 넣고 꽂기만 하면 바로 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었다. (심지어 티비도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비슷한 삼성 TV였다.) 침대에 누워서 주말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한국에서의 일상을 그대로 핀란드로 옮겨 온 느낌이었다. 에어비앤비의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슬로건이 딱 맞아떨어진다고나 할까.
낯선 공간에서의 익숙한 생활패턴이 참 미묘하게 어우러지면서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런 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 날 만날 무민월드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채운 채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