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제2막 드디어 시작
남편과 헬싱키 공항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파리로 향했다. 유럽 내 이동하는 비행기여서 그런가, 핀에어를 탔는데도 좌석 간격이 저가항공처럼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기내식도 없다. 좁은 자리에서 두어 시간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새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 엄마가 도착하는 터미널 1까지 가려면 셔틀 트레인을 타고 넘어가야 했는데, 뭐든 메인 터미널에 시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서둘러 터미널 1로 향했다.
엄마가 탄 아시아나항공 비행기가 도착하기까지는 3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내가 상상한 건 넓은 유러피안 감성의 카페에 앉아 이북을 읽거나 브런치를 쓰면서 시간을 보내는 거였는데, 터미널 1에 제대로 된 카페는 없고 작은 브리오슈 도레 하나뿐이었다. 역시 유럽에서는 뭐든 인천공항 기준으로 생각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이미 터미널 넘어와서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전 터미널에서 스타벅스 있었는데 거기에서 시간을 보낼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뭐 별 수 있나. 브리오슈 도레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하나 시켜놓고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엄마를 기다리면서 나의 지난 파리 여행들을 떠올렸다. 벌써 여기가 세 번째라니.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도 갔던 곳을 이렇게 여러 번 와보지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세 번이나 오게 됐다.
첫 번째 파리 여행은 2009년 11월이었는데, 오슬로에서 교환학생 하던 때 라이언에어 타고 와서 일주일 정도 지냈었다. 유럽 저가항공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도시의 허브 공항이 아니라 외곽의 터미널 같은 작은 공항으로 들어오는데, 밤늦게 공항에 도착해서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 묵고 그 다음날 기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학생들은 기차 요금을 저렴하게 받는데 검표원이 그걸 모르고 일반 비용을 지불하라고 하는 사이 같이 숙소에 묵었던 벨기에 친구가 나는 학생이라고 설명해줬던 것, 11월 11일이 1차 세계대전 휴전 기념일이라 개선문에 큰 프랑스 국기가 걸려있던 것, 비 오는 저녁에 그 개선문을 걸어서 올라갔던 것, 2009년이 에펠탑 120주년이라 화려한 조명으로 장식된 에펠탑을 볼 수 있었던 것, 삐에르 에르메에서 마카롱 30개 정도 사서 갔는데 저가항공이라 핸드캐리 짐 1개 이상 안된다고 하는 항공사 직원한테 '마카롱을 어떻게 캐리어에 넣냐, 잘 알다시피 이거 잘 부서지는 거라 캐리어에 담을 수가 없다'라고 따박따박 따졌던 것.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그렇듯, 나의 첫 번째 파리 여행은 절대 여유롭거나 풍족하지 못했다. 일주일이나 머물렀지만 파리의 모든 것을 소화하기엔 역부족이었고 내 마음 또한 카페에 느긋하게 앉아 책을 읽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아예 물병을 들고 다니면서 하루 종일 걷고, 레스토랑에 앉아 식사하는 건 손에 꼽을 만큼 있었던, 그런 여행이었다.
두 번째 파리 여행은 2011년 8월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첫여름휴가였고, 지금보다는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2011년 해가 밝자마자 우선 항공권부터 결제했던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내 돈을 벌어서 가는 것이다 보니 첫 번째 여행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었다. 그 때 친구가 파리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도 유럽 여행을 하던 중이라 파리에서 만나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친구들과 같이 파리 근교에 있는 지베르니, 몽생미셸을 다녀왔던 기억이 난다. (몽생미셸은 당일치기하려다 보니 30분 정도밖에 있지 못했지만....)
그리고 2011년은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가 개봉했던 해였다. 마침 내가 파리에 있는 동안 영화가 걸려있어서 영화 속에 스쳐 지나가면서 등장했던 'UGC Danton'에서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볼 수 있었다.
# 언제 봐도 설레는 미드나잇 인 파리 오프닝 씬
세 번째 파리 여행은 2017년 6월, 엄마와 함께하는 패키지여행이다. 가족여행은 자주 있었지만, 엄마와 둘이 온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이 도시를 두 번이나 왔던 나와는 달리, 엄마는 늘 파리에 오고 싶어 했고 가장 기대하기도 했다. 나는 세 번째 만남에 익숙할 법도 한데 지난 여행과는 다른 환경에 놓여있으니 또 색다른 기분이었다.
과연 6년 만에 만난 이 도시는 내게 어떤 기억을 안겨줄까.
드디어 아시아나항공 비행기가 샤를 드 골 공항에 착륙했다는 사인이 전광판에 나왔다. 조금 더 기다리고 있으니 엄마가 입국장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파리에서 엄마와의 만남이라니! 김포공항이나 제주공항이 아닌 곳에서 엄마를 만난 게 처음이라 나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것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이 패키지 그룹에 현지 합류한 건 나 혼자라서 가이드가 '복잡한 파리 공항 찾아오느라 고생 많았다'라고 얘기해 주었다. (사실 공항에 사인이 워낙 잘 그려져 있어서 화살표만 쫓아가면 헤맬 일은 없다.) 패키지 그룹은 스물다섯 명이었는데, 적당히 그룹 투어 하기 좋은 인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나의 지난 여행들과 패키지여행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전용 버스가 어디든 데려다준다는 것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지하철역을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도 되고, 길을 헤맬 일도 없다. 어릴 때는 '내 마음대로 부지런하게' 다니는 여행이 훨씬 좋았는데, 이제 삼십 대가 지나고 보니 '몸이 편한' 여행을 찾게 된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라면, 이 장점이 더욱 극대화된다는 점.
이 날은 별다른 스케줄이 없고 공항에서 바로 호텔로 이동한 다음 쭉 쉴 수 있었다. 엄마는 장기간 비행에 살짝 피곤해 보였지만 다음 날 파리 여행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이미 유럽 시차를 살고 있었지만, 방금 유럽에 도착한 엄마는 시차 때문에 씻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처음으로 유럽에서 '고급이 아니어도 아침이 나오는' 호텔에서 묵고, '대중교통을 타지 않고' 다닐 수 있다니. 나의 세 번째 파리 여행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날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