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로망이었던 도시, 본격 파리 여행
패키지 여행자의 시계는 자유여행자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보통 나는 아침 8~9시쯤 느긋하게 일어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빈둥거리다가 여행을 시작하는데, 패키지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평소보다 1~2시간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그나마 첫 여행일이라고 여유 있는(?) 일정을 잡아줬지만 아침 9시에는 호텔에서 나가야 했다. 이 날부터 10일간, 내게 아침 늦잠은 없었다.
엄마가 꼭 오고 싶어 했던 도시, 파리. 내가 패키지여행을 찾아보기 전에 진심으로 '파리에만 1~2주 있는 거라면 자유여행을 해도 괜찮다'라고 했지만 엄마는 첫 유럽여행인 만큼 많은 것을 보고 싶다며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루브르나 오르세,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마음껏 시간을 보내기엔 자유여행이 더 괜찮을 텐데. 그렇지만 언제 올 지 모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2009년 유럽여행을 다니던 대학생 때의 나와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다행히 우리가 선택한 패키지에는 자유시간이 많이 포함돼 있어서 중간중간 엄마와 자유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에펠탑, 샹젤리제 거리 같은 관광명소는 이미 두 번이나 다녀갔는데, 살짝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약간의 설레는 마음을 안고 우리의 파리 일정이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향한 곳은 에펠탑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샤요 궁이었다. 버스를 타고 트로카데로 광장 앞을 지나는 순간 버스 안에 환호성이 터졌다. 엄마도 창 밖의 에펠탑을 보면서 좋아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에펠탑이 생각보다 크게 눈 앞에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날씨가 흐려서 조금 아쉬웠는데, 에펠탑을 배경으로 잔뜩 셀카를 찍고 나니 정말 파리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왼쪽) 2011년 8월, 샤요 궁 앞쪽 벤치 / (오른쪽) 2009년 11월 어느 날 저녁 8시 전후, 에펠탑 바로 밑
대부분의 파리 여행자들이 그렇겠지만, 파리 어디를 가나 보이는 에펠탑이 딱히 지겹지는 않다. 그 때문에 낮이나 밤이나,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에펠탑 사진을 하염없이 남기게 되는 것 같다.
잠시 에펠탑을 보고 향한 곳은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나도 예전에 온 적이 있지만 그때 봤던 그림 찾아가려고 하면 찾을 수가 없을 만큼 넓다. 자유여행으로 왔다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여할 수 있는 오디오 가이드에 의지해서 다녔겠지만, 우리에게는 여행사에서 나눠준 수신기가 있다. 예전에 패키지여행할 때는 가이드가 육성으로 설명하는 걸 듣기가 힘들어서 오히려 여행의 재미가 반감되기도 했는데, 요즘은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가이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라디오 같은 걸 나눠준다. 덕분에 길을 헤맬 일도 없고 설명을 들으면서 그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귀는 열어두고 눈은 내가 보고 싶은 걸 보면 되니까!)
짧은 시간이지만 어쩜 그리 유명한 작품을 쏙쏙 골라 설명해주는지,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 어릴 때는 가이드 설명 듣는 게 지루했는데 이젠 그림 속 배경 설명까지 같이 들으니까 또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왜 어른들이 설명 듣는 걸 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우리가 점심식사를 한 곳은 몽파르나스 타워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큰 유리창을 통해서 에펠탑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음식 맛이 엄청나게 좋거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만약 파리에 에펠탑이 없었다면 이렇게 많은 관광객들이 이 도시를 찾았을까?
(왼쪽) 노르트담 성당 도착하자마자 찍은 사진 / (오른쪽) 자유시간 지나고서 찍은 노르트담 성당.
점심을 먹고 우리는 노트르담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정말 아름다운데, 무슨 이유에 선지 입장을 할 수가 없었다. 자유여행자라면 줄 서서 기다려보거나, 아니면 다음 날을 도모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정해져 있는 패키지 여행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신 그만큼 자유시간을 얻었고, 기념품샵에서 저렴하고 깔끔한 가방을 산 다음 엄마와 근처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5유로 주고 산 숄더백은 디자인은 예뻤지만 이틀 만에 지퍼가 고장 났음... 역시..)
노트르담 성당 앞에는 파리의 기준이 되는 도로 원표인 '포앵 제로'가 있다. 이 곳에 발을 올려놓으면 다음에 파리에 오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파리 올 때마다 반드시 들르는 곳이기도 했는데,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실제로 세 번이나 파리에 오게 됐으니 포앵 제로의 효험(?)이 있는 거라고 믿고 싶었다.
개선문 앞에 갔더니 비 오는 날 야경을 보겠다고 저 개선문을 걸어서 올라갔던 기억이 났다. 개선문 위에 올라가면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도로들이 눈에 보이고, 개선문과 일직선 상에 놓여있는 라데팡스를 볼 수 있다. 겨울에 가까운 늦가을 밤에 우산 없이 (....) 비를 맞으며 개선문 위에서 오들오들 떨었었는데...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안 할 것 같은 일 중 하나다.
이 날의 여행은 대부분 '파리의 유명 관광지'이자 '지난 내 파리 여행에 다녀왔던 곳'들을 가는 것이었는데, 에펠탑 위에 올라가는 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오랫동안 줄 서서 기다려야 하기도 하고, 어디 올라가는 걸 딱히 좋아하지 않아서 굳이 올라갈 생각을 안 했었다. 하지만 막상 올라와보니, 앞서 말한 개선문(...)하고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그간 내가 봐 왔던 풍경에는 항상 에펠탑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에펠탑이 없는 파리 풍경을 보는 것이다. 센 강 위로 유람선들이 지나고, 파리 외곽의 높은 빌딩들까지 한눈에 보이는.
에펠탑 위에서 내려온 다음 우리는 바토 무슈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전에 내가 바토무슈를 탔던 8월은 이미 하지가 지났던 때여서 8~9시면 어둑어둑해지고 에펠탑에 들어온 불도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파리에 있던 때는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 덕분에 밤 10시가 다 되도록 하늘은 어두워지지 않았고 에펠탑에 불이 들어와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에펠탑의 매력은 정각 때마다 반짝이는 불빛인데...
바토무슈를 타면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세느강변에 있는 여러 건축물들을 볼 수 있지만... 아직 한국 시차를 살고 있는 우리 엄마는 유람선 위에서 졸기 시작했다. 하긴, 적당한 흔들림에 나직한 목소리로 나오는 안내방송이면 너무나 딱 잠들기 좋은 환경이다. 나는 이게 두 번째라 괜찮은데 엄마가 바토무슈를 놓치면 어쩌나 싶어서 계속 엄마를 깨웠지만, 졸음 앞에서는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었다.
엄마의 유럽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걱정 되는 부분도 좀 있었다. 쉬러가는 여행이 아니라서 많이 걷기도 해야하고, 소매치기도 많은데 엄마가 피곤해하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는 유럽여행의 시작, 파리에서의 일정을 매우 즐거워했다.
엄마의 첫 번째 파리는 기대만큼 좋았다고 했다. 특히 엄마는 내 예상대로 루브르 박물관을 가장 좋아했는데, 1시간의 자유시간이 있었어도 아쉬울 정도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뮤지엄 패스 끊고 파리 여행을 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나의 네 번째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