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일기, 1월 19일
[사진설명] 스페인어 강의를 등록하고 받은 수강증.
내 주변의 사람들은 크게 공감하지 않겠지만, 나는 꽤 충동적이다. 얼마 전 tvN에서 하는 <윤식당2>와 픽사의 <코코>를 보고 나서 무작정 스페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어는 글자조차 알지 못하고 막연하게 미디어에 노출된 언어만 보면서 '재밌겠다'라고 느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10월에 스페인 여행이 예정되어 있으니 스페인어를 배울 명분은 충분했다.
다행히 회사 건물에 스페인어를 배울 수 있는 학원이 있어서 바로 수강신청을 했다. 일주일에 두 번, 3개월 간 배우면 하나의 레벨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하는데 3개월 뒤에 과연 어느 정도로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스페인 여행 가서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면 좋겠지만 그간 내가 영어공부에 들인 시간을 생각해보면 3개월 가지고는 택도 없을지도 모른다.
의식의 흐름대로 내가 외국어에 투자한 시간들을 떠올려봤다.
역시 국제 공용어이자 많은 사람들의 신년 목표에서 빠지지 않는 영어에 가장 많은 시간을 썼다. 내가 처음 영어를 배운 건 9살이었나 10살 때였던 것 같은데 당시 제주도에 조금씩 생기고 있던 '영어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원어민 선생님이 수업을 했고, 처음에는 알아듣는 말이 (당연한 말이지만) 별로 없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3-4줄 그어진 노트에 회색으로 영어 알파벳이 쓰여있고 또박또박 연필로 글씨를 따라 쓰는 것이 내 영어공부의 첫 기억이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에서 영어 수업이 있었고 나는 수학보다는 영어가 훨씬 재밌었다. (그 후 수포자가 되었고, 문과를 선택한 다음 인문대에 입학했다.) 모르는 단어에 형광펜으로 표시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뜻을 쓰거나 단어장을 만들고 우리나라 말과 다른 문법을 익히는 것 그 자체가 흥미로웠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수능 외국어영역에 최적화된 영어 실력을 갖고 있었고, 영어로 말할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의사소통' 측면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냥 빨리 문제 푸는 법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한 건 대학생이 되고나서부터였다. 교환학생 신청을 하려면 토플 점수가 일정 수준 이상 이어야 했는데 이 시험은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것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매일 토플 수업을 4-5개월 정도 들으면서 단시간 내에 비약적으로 영어실력이 늘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려운 단어들을 많이 외웠고 학술적인 글들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학원에서 알려 준 꿀팁들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주제를 파악하고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글을 작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플 점수가 외국 대학교에서 수업 들을 수 있는 최소 조건이었던 걸 감안하면 이 또한 정말 사람 대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역할은 그다지 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교환학생에 합격하고 노르웨이에 도착하자마자 이제야 실전 상황에 돌입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종이 위에 텍스트로만 떠다니던 영어가 이제는 눈과 귀로 한 번에 들어옴과 동시에 빠르게 이해하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내 머릿속에서 번역기를 돌릴 시간도 없고 그냥 영어로 생각하고 바로 말할 수 있어야 어설프게나마 그들의 대화에 동참할 수 있었다. 초반에는 '미안한데 다시 한번 얘기해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던 게 기억난다. 영어로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하고 조 모임도 해야 하고, 그 사이에 주변 나라로 여행 다니면서 좌충우돌 돌발상황에도 대처하다 보니 그제야 내가 다른 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내가 편하게 쓰는 표현도 생기고, 머리로는 의식하는데 실전에서는 잘 안 되는 표현을 어느 정도 구분하게 됐다.
이후에 딱히 영어를 쓰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았다. 영어로 된 긴 글을 읽을 일도 별로 없고 일 년에 한두 번 여행지에서 대화하는 것 말고는 영어로 말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워낙 외국에서 오랜 기간 살다 온 사람들이 많다 보니 어지간해서는 '영어 잘한다'는 말 듣기도 어려운 데다가 인공지능 번역기들이 너무나 잘 되어 있어서 굳이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사이 영어 회화 수업을 듣긴 했어도 예전만큼 내 언어 실력이 눈에 띌 만큼 늘지도 않았다.
지난 20년을 투자했지만 내 영어 실력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게다가 요즘은 그나마도 있던 영어 실력이 퇴화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럼에도 내가 새로운 언어를 배워보겠다 도전하는 이유는 순전히 '재미' 때문이다. 악기를 하나 더 배우거나 프로그램 쓰는 법을 익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의 재미인데, 말로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다는 것만으로도 꽤 뿌듯하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도 <윤식당2> 하는 날이다. 아름다운 스페인 가라치코 섬 풍경과 함께 스페인어를 들으며 나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불태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