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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앨리스 Feb 14. 2018

발렌타인데이 특집, 소개팅의 기억

스무 번째 일기, 2월 14일

4년 전 이맘때였던 것 같다. 친구가 직장동료를 소개해 준다고 해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내가 글로 배운 소개팅 법칙에 의하면 (나는 이제까지 소개팅을 딱 두 번 해봤다. 그중 두 번째 소개팅이었다.) 연락처 전달되면 바로 그 주 주말에 보자고 얘기한다는데, 이 남자는 자기 생일 주간이라 바쁘다고(!) 거의 보름이 지나서야 만나자고 했다. 뭐 본인 생일에 얼마나 많은 스케줄이 있길래 2주 뒤에야 만날 수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러자고 했다. 만나는 당일 전까지는 아무 연락이 없었고 약속한 날, 약속한 장소에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저녁식사를 했다. 


#첫번째만남

첫 번째 만남 장소는 소개팅의 정석인 파스타 집은 아니었다. 나도 그렇지만 그도 말하는 걸 어색해하거나 말이 없는 편은 아니어서 대략 서로 무슨 일하고, 어떤 걸 좋아하는지 등등 편하게 대화를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했고,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다음 소개팅 코스가 늘 그렇듯 카페로 자리를 옮겨서 대화를 하고 집에 가려는데 그가 차로 집에 데려다준다고 하는 것이다. 불편한 구두도 신었겠다, 날씨도 추우니까 덥석 차에 얻어 타고 우리 집 방향으로 향했다. 


나는 그때까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데이트는 해 본 적이 없어서 기분이 오묘했다. 나이는 딱 한 살 차이인데 엄청 어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나는 그 당시 장롱면허였어서 내가 못 하는 걸 잘(?)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니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콩깍지다. 


그런데 터널 하나 지나서 나오는 순간, 쾅. 옆에서 오던 차가 우리가 탄 차를 받은 것이다. 뭐 아주 세게 들이받은 건 아니었지만 교통사고는 교통사고였다. 아니 오늘 초면인 사람 차를 얻어 타고 가는데 교통사고라니, 나도 같이 내려서 뭘 얘기해줘야 하나 나 뒷목이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어리둥절해 있다가 얼렁뚱땅 현장을 수습하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도 정신이 없어서 대충 상대방 연락처만 전달받고 끝냈던 것이었다. 그 날 서로 조심히 들어가라는 인사를 하고서 소개팅 첫 만남이 끝났다. 


#두번째만남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소개팅 경험이 별로 없다. 글로 배운 소개팅 법칙에 의하면 소개팅 다음 날쯤 애프터 약속을 잡는다는데 이 사람은 주말에 소개팅을 하고서 그다음 월요일이 될 때까지 아무 얘기도 없었다. 소개팅 당일 교통사고 얘기(...)와 집에 잘 도착했다는 정도의 형식적인 메시지가 끝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까인 건가 싶었는데, 소개팅하고 정확히 3일 뒤에 연락이 왔다. 애프터 신청이었다. 


애프터 신청에 대한 기쁨은 잠시, 왜 3일이나 지나서야 연락이 왔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뒤덮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밀당인가? 믿거나 말거나, 나중에 듣고 보니 당시 핸드폰이 고장 나서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고 한다. 뭐 그래도 애프터는 받았으니 흔쾌히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참 밀당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현재도 그렇다.) 


두 번째 만남은 평범했다. 파스타 가게에서 식사하고, 당시 유행하던 소프트리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고. 그런데 나중에 배경을 알고 보니 그는 전 날 (우리가 만난 날이 일요일이었다.) 친구들과 강원도에 있는 스키장에 갔고 밤을 꼴딱 새운 다음 다시 집으로 넘어와서 나와의 저녁 약속을 수행한 것이었다. 그때 특별히 피곤해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의 의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세번째만남

미식을 좋아하는 그는 모든 만남 전에 괜찮은 식당을 예약해 두었다. 세 번째 만남에서 간 곳은 유명한 재즈바였다. 그때 우리 모두 20대 후반이었는데 우리가 오기에는 약간 노숙해 보이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드라마에 재벌집 아들이 와서 고뇌할 것 같은 배경의 장소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편하게 맥주 마시고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고 어두운 조명에 와인이 어울리는 장소였다. 


알고 보니 그도 여기 처음 왔는데 클래식(?)한 분위기에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에는 평소에 이런 곳 늘 와 봤던 것처럼 평온한 척하느라 우리 둘 다 애썼다. 


그다음에 우리는 EDM 음악이 흘러나오는 칵테일 바에 가서 자정이 한참 지날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데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랑 이야기 나누는 것처럼 편안했다. 이 시간에 서로의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걸 많이 깨달았다. 정치, 종교, 경제, 젠더관까지 자칫하면 민감할 수 있는 주제들에 대해 대부분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또한 불편한 주제를 꺼내도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았다. 


#네번째만남

세 번째 만남에서 한참 수다를 떨었는데도 그는 다음 날 바로 또 보자고 했다. 그것도 브런치를 먹자고. 12시간도 되지 않아서 다시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날 우리는 디저트가 맛있는 곳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차 트렁크에서 큰 작약 꽃다발을 꺼냈다. 지나가는 말로 가장 좋아하는 꽃이 '작약'이라고 했는데 그걸 기억해서 준비해 온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연애한 지 1년 반쯤 지나 결혼했다. 아직도 나는 소개팅 첫날 바로 애프터 메시지를 하지 않았다며 놀리곤 한다. 정말 밀당 아니었냐고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보라고 몇 번을 물어봐도 그게 아니었다고, 처음 본 순간부터 연애하고 싶었다고 늘 똑같이 얘기한다. 이제는 같이 살기로 했으니 믿어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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