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번째 일기, 2월 18일
내 생애 첫 팬질은 god 였다. H.O.T. 나 젝스키스는 나보다 두세 살 정도 많은 언니들한테 정말 인기가 많았고, 나와 내 친구들은 god, 신화, 동방신기를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god, 그중에서도 손호영을 가장 좋아했던 이유는 편안한 느낌이 좋아서였다. 물론 당연히 당대 최고의 스타니까 평생 볼까 말까 한 인물인데도 마치 가까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다. 늘 웃는 모습이 멋져 보이기도 했고... 이게 다 육아일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1997에 보면 잡지를 찢어서 친구들과 나눠갖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고증이 잘 된 장면이다. 잡지 한 권 사서 각자 좋아하는 그룹, 멤버들 사진을 나눠갖고 파일철에 꽂아서 보관하고 그랬다. 몇몇 잘 나온 사진은 내 방 문이나 사물함에 붙여놨었다. 팬카페에서 능력자들이 펜에 두르는 띠랑 시간표도 만들어줘서 컬러 프린트한 다음 모든 학용품에 붙이기도 했었다.
수업시간에는 읽으라는 책은 안 읽고 팬픽을 열심히 읽었다. 글자 크기 7포인트에 다단 네 개로 나눠 놓은 종이 묶음이었는데 최대한 빨리 읽고 다음 친구에게 넘겨야 했다. 덕분에 나는 그때부터 글을 빠르게 읽는 능력이 생겼다. 팬질 덕분에 능력치 +1이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는 온라인으로 팬질을 했는데 제주도에는 잘 안 나오는 SBS 방송 출연 화면 (지방방송 틀어줘서 못 본적이 많다), 잡지 화보, 앨범 재킷 등등 모든 사진을 다운로드하여 놓고 감상했다. 당시 팬페이지도 많아서 즐겨찾기가 한 바닥일 정도였다. 가끔 포토샵으로 간단한 이미지 보정이나 움짤 (당시 유행하던 반짝이 도장 같은...)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후 나의 생활 포토샵 기술이 꽤 발전했다. 팬질 덕분에 능력치 +1 추가요.
꽤 가열하게 팬질을 했지만 제주도에 있어서 공연을 못 가는 게 참 아쉬웠다. 만약 그때 내가 서울에 살았으면 나의 모든 돈과 시간을 팬질에 쏟아부었을 게 당연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지켜줬다는 측면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신경 쓸 게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팬질을 쉬게 됐지만 어제 토토가 보고 나니 10대 때 기억이 마구 떠오른다. 누군가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좋아해 보는 것도 다 추억이 되는구나 싶다.
오래간만에 오빠들 사진 찾아보고 노래 들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