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네 번째 일기, 3월 5일
우리 부부에게는 써야만 하는 돈이 있다. 몇 천만 원 단위의 아주 큰돈도 아니고 현금화하지는 못하지만 특정 일자까지 카드로 결제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는 독특한 형태의 돈이다. 처음에는 우리 둘 다 의욕에 불타서 맘껏 질러주겠노라 다짐을 했건만, 우리는 어제 지름에 실패했다. 여주프리미엄아울렛에 갔는데 사 온 것이라고는 그다지 비싸지 않은, 하지만 프린트가 귀여운 헤지스 니트 하나, 자주에서 도미 사료통과 양말 몇 켤레, 거실화가 끝이었다. 여주까지 가서 사 온 게 고양이 사료통이라니...
이렇게 집에 들어갈 수 없다며 판교 현대백화점으로 향했다. 아울렛과는 다르게 백화점이니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당연히 있을 거라며! 평소에 사지 못했던 브랜드 신발이라든가, 아울렛에서만 샀던 브랜드의 옷이라든가 등등. 하지만 우리 부부의 메마른 마음을 사로잡는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써야만 하는 돈이라지만 100%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에는 1원도 쓰고 싶지 않았다. 결국 현대백화점에서는 레스토랑 이탈리에서의 결제가 처음이자 끝이었다.
소비요정으로 불리던 우리 부부에게 왜 물욕이 사라진 걸까? 한참 생각하다 우리는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유형의 물건으로는 이 허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집을 비워내야 사고 싶은 것이 생길 것이라며. 그래서 우리는 물건을 사는 것 말고 무형의 것에 투자하기로 했다. 피부관리나 필라테스 같은 것 말이다. 아, 지금 쓰면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물건의 형태가 너무나 제한적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