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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느 바다 한 가운데 Dec 05. 2019

평균의 종말

2019.05.02에 읽고 적었던 평균의 종말

2019.05.02

평균의 종말

(토드 로즈)


<들어가며>


우리들에게 평균이란 무엇인가? 나에게 평균이란 무엇인가? 평균이란 우리 집단의 표본이고 나의 위치를 판단하는 기준이다. 이렇게 항상 생각해왔다. 하지만 키, 몸무게, 가슴둘레 등등 사람의 신체 치수를 비교하여 평균 내었을 때, 이 평균에 일치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즉, 이 세상에는 평균적인 사람이란 없었다. 그래서 개개인과 관련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라면 평균은 쓸모가 없다. 이 책으로 들어가며 평균에 대한 의문이 짙어졌다. (하지만 단체와 단체를 비교할 때는 평균이 유의미하다)


<평균의 탄생>


 평균을 바탕으로 한 많은 실험들, 대표적으로 사랑할 때 뇌의 어느 영역이 활성화된다거나 공포를 느낄 때 뇌의 어떤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식의 연구 발표는 평균적 뇌지도의 발표임이 틀림없다. 우리 모두는 뇌의 모양이 다르며 같은 상황이라도 활용되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밀러”의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다.


  현대 사람들은 평균을 앞서기 위해 애를 쓴다 즉 반사적으로 평균을 비교해서 판단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퍼센트의 정도에 따라 고생길행이냐 성공행이냐를 가른다. 유형화와 계층화가 아주 기본적이고 마땅한 일로 여겨지면서 우리들은 그 판단이 어떠하든 예외 없이 판단을 받는 사람의 개개인성을 묵살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표준화된 세상>


 테일러의 표준화가 세상을 덮쳤다. 테일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하려는 근로자는 최악 중의 최악이라 명했다. 테일러의 표준화에 의해 회사에는 수칙이 적힌 매뉴얼이 있고 근로자들은 이 매뉴얼을 어겨서는 안 됐다. 소매점, 식당, 공장 등 어디를 가든 시스템이 최우선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렇게 시스템이 최우선이 되었고 개개인성은 무시되었다


 테일러의 표준화에 의해 오늘날의 관리자 개념이 탄생했다(관리자란 실무 의사결정자이다) 관리자가 탄생함으로써 근로자들은 다음의 두 가지만 유념하면 되었다 “내가 지금 누구를 위해 일을 하고 있는가?” 와 “이 사람(관리자)이 나에게 바라는 일은 무엇인가?” 즉, 근로자의 뜻이 아닌 지휘하는 그 사람의 뜻을 섬겨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산업계는 테일러 주의(taylorism)가 휩쓸었다.


 산업계는 평균이라는 수리에 의존했고, 그렇게 태어난 관리자들은 사원에 대한 오판을 내린다 해도 시스템에 잘 맞추지 못한 탓이라고 그 사원에게 허물을 씌우면 간단히 해결되었다. 현재까지도 평균에 수렴하려는 과학적 관리법은 모든 산업국가에서 가장 지배적인 기업 조직의 원칙으로 남아있다.


 산업계를 넘어 교육계까지 스며든 테일러식 원칙, 곳곳의 학교들이 ‘게리플랜Gary Plan’을 채택했다 그 원조 격인 인디애나주의 산업화 도시 지명을 따서 이름 붙여진 게리플랜은 학생들을(성적이나 관심사, 적성 별이 아닌) 나이별로 나눠놓고 그렇게 분리된 그룹별로 교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표준화된 시간 동안 수업을 받게 하는 방식이었다


 학교 종은 학생들이 미래의 직장생활에 정신적 준비를 갖추기 위해 공장의 종을 흉내 낸 것이라 한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오늘날 교육계에 큰 영향을 미친 손다이크, 그는 학교의 목표는 모든 학생을 똑같은 수준으로 교육시키는 것이라 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골튼 계층의 개념(골튼 계층:우월층이 모든 면에서 우월한 계층이라는 의미)에 따른 우등생과 열등생을 구분하여 우등생에게 투자하고 열등생은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평균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 보다(평균) 더 뛰어나려고 애를 쓴다.


 평균을 추구하고 나아가 평균을 뛰어넘어야 하는 우리들은 대안적 진로를 따라가면 순진하다거나 그냥 틀렸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즉, 뛰어난 역량 발휘가 시스템 적응능력(순응)이 더욱 우선시되는 것이다


<평균주의 뒤엎기>


 그룹에 대한 정보를 개개인에 대한 정보로 대체하면 완전히 틀린 답을 얻게 되는데 이것을 “에르고딕 스위치가 작동했다”라고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타이핑 속도와 오타 수의 상관관계를 알아보고자 한다면 평균주의자들은 종합 후 분석을 할 것이다. 즉, 그룹의 정보를 먼저 분석할 것인데 그중에서는 타이핑 속도가 빠를수록 오타 수가 줄어드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때 에르고딕 스위치가 작동하여 평균 주의자들은 오타수를 줄이고 싶다면  타이핑 속도를 빨리하라는 결론을 지을 것이다. 이처럼 에르고딕 스위치를 작동하면, 다시 말해 개개인에 대한 정보로 대체하면 완전히 틀린 답을 얻게 된다.


 이러한 평균주의 허상에서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개개인학에 의거한 3가지 원칙을 알아볼 것이다. 바로 들쭉날쭉의 원칙, 맥락의 원칙, 경로의 원칙이다. 이 3가지 원칙이 평균에 대한 의존을 대체해줄 것이다 진정한 개개인성의 패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재능은 다차원적이다>


개개인학에 의거한 첫 번째 원칙은 들쭉날쭉의 원칙이다. 들쭉날쭉하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원칙은 2가지 기준에 부합하여야 한다. 첫 번째, 반드시 다차원로 이루어져 있을 것. 두 번째, 반드시 이 여러 차원들 사이에 관련성이 낮을 것 이 두 가지 기준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체격을 예로들어보자 ‘둘 중 누가 키가 큰가?’ 키는 일차원적이므로 누가 키가 큰지에 따라 답을 하면 된다. 하지만 ‘둘 중 누가 체격이 큰가?’라는 질문은 이야기가 다르다. 서로 별로 연관성이 없는 여러 가지 다른 차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리의 대다수가 다소 비대한 편이거나, 다소 왜소한 편인 신체 부분이 적어도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중요한 특성은 거의 모두 다차원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중에서도 재능이 더 그렇다 재능의 평가에서 일차원 방식을 취해서는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 내지 못한 수많은 사례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인간의 여러 가지 특성을 들쭉날쭉한 것으로 인정하려면 다차원적일 뿐만 아니라 각 차원이 비교적 독립적이어야 한다. 이런 독립성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희박한 연관성이다. 즉, 각각 요소들이 ‘약한’ 관계를 유지하며 누군가의 키나 목둘레나 주먹 너비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나머지 차원의 치수를 얼추 가늠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적 재능은 들쭉날쭉해서 IQ 점수 같은 일차원 값으로만 평가 , 판단이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의 들쭉날쭉성을 이해하게 되면 재능에 대한 일차원적 관점에 사로잡혀 자신의 역량을 제약당할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다. 예로 들어, 추론 능력에 관련된 입학시험문제가 있다고 하면 대다수 및 고득점자들(평균의 풀이법)의 풀이 방법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푸는 것이 바른 길이라는 것이다.(다른 고득점자가 단기 기억에 의존하여 문제를 푼다고 해서 그것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메타인지를 높여 자신이 뛰어난 능력(시각적 능력, 조직화 능력.. 등등)을 발휘하여 문제를 푸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고 우리의 장래성에 대한 자의적이고 평균 중심인 견해의 굴레에 속박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들쭉날쭉성을 인정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본질주의 사고 깨부수기>


 사실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 게으른지 부지런한지, 다정한지 쌀쌀한지의 여부는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영혼 깊숙이 은밀하게 내재되어 있어서 이런 성격 규정이 그 어떤 환경에서나 업무에서나 진가를 발휘하기 마련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런 믿음을 가리켜 본질주의 사고(essentialist thinking)라 한다.


 본질주의 사고에 의해 우리들은 상대방의 성격과 행동을 결론지을 수 있다고 여긴다. 즉, 누군가의 특성을 알면 학교든 직장생활이든 심지어 데이트 상대로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빗나가기 일수인데, 그 이유는 개개인성의 두 번째 원칙인 맥락의 원칙 (context principle)을 철저하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특성 중심의 성격검사는 어떤 사람이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둘 중 하나이며 동시에 둘 다 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워싱턴 대학교 교수 유이치 쇼다의 사회과학 실험을 통해 사람들은 맥락에 따라 성격이 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를테면 어떤 아이는 매점에서 외향적이지만 운동장에서는 내향적인 아이였다. 또 다른 아이는 운동장에서 외향적이였지만 수학 시간에는 내향적이였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경우든 행동 방식이 개개인과 상황 모두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평균적인 성향이나 ‘본질적 기질’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해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그보다는 그 사람의 맥락에 따른 행동 특징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행동은 특성이나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독자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공격성은 성격의 ‘본질’이 아니라 공격성을 띄는 상황과 띄지 않는 상황이 있을 뿐이다. 도덕성 또한 그렇다 맥락적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의 원칙을 이해하면 우리들은 다양한 이점을 안을 수 있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고 주위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말로 개인적, 직업적 성공에서 핵심적 요소이다.


 맥락의 원칙이 이해하기 쉽고 당연하다고 느끼기는 쉽지만, 사람들의 행동을 특성처럼 느끼는 이유는 당신이 그 사람들의 맥락 중 일부분만 차지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상사가 당신 앞에서 고압적이고 오만한 행동만 보여 상사를 그러한 사람이라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 앞에서만 그러한 행동을 취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우리들은 상대방이 살아가는 다양한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 탓에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그들이 어떠한 사람인지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이해했다면 불리하거나 자멸적인 행동을 저지르게 될 만한 상황들을 분간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누군가가 신경과민이라거나 공격적이라거나 쌀쌀맞은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 때마다 그것이 하나의 특정한 맥락에서만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즉 우리들은 누군가를 판단할 때 스스로를 다잡으며 그 행동이 지각 있고 분별 있게 느껴질 만한 상황들을 상상해 보려 애써야 한다. 그러면 대체로 상대편의 맥락을 이해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맥락을 그 상대편에게 투영하려고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상대방과 자신이 놓인 상황 속에서 그 순간만의 맥락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한다면 마음의 문이 열려 본질주의 사고로는 어림없는 수준의 넓은 도량으로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이러한 이해와 존중은 우리에게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긍정적 관계의 토대이다.


<이정표 없는 길을 걷는다는 것>


 우리들은 평균주의에 속아 ‘정상적’ 뇌, 신체, 성격의 개념을 믿고 따른다. 그리고 또 하나, ‘정상적’ 경로에 속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배우고 목표를 달성하는 하나의 올바른 경로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확신은 규범적 사고에 기인하는 것이다. 규범적 사고의 핵심 가정은 평균적인 사람, 아니면 적어도 성공한 졸업생이나 전문가처럼 본받고 싶은 어떤 특정 그룹의 평균적 일원이 따르는 길이 올바른 경로라는 것이다.


 이처럼 규범적 사고라는 정신적 장벽을 극복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인간의 발달 경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의 정상적인 경로가 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 개개인성에 맞는 길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인간의 발달은 (생물학적 발달이든, 혹은 정신적, 도덕적, 직업적 등등의 발달이든) 그 종류를 막론하고 단 하나의 정상적인 경로란 없으며 개개인은 경로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경로의 법칙 다음 2가지 확신을 중요하게 여긴다. 첫 번째, 우리들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여정을 포함하여 우리의 인생은 똑같은 결과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갈래이며 그 길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두 번째, 당신에게 잘 맞는 경로는 당신 자신의 개개인성에 따라 결정된다


 오늘날 교육과정에서는 빨리 푸는 사람이 더 똑똑하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20세기 가장 유명한 교육학자 벤저민 블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것은 맥락과 어긋나며 개개인성을 존중하지 않은 판단이다. 어떤 아이는 분수 부분에서 강점을 나타내지만 소수 부분에는 약점을 나타냈다. 또 다른 아이는 분수 부분에서 약점을 나타냈지만 소수 부분에서는 강점을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마다 강점을 띄는 부분이 다르며 습득하는 데에 있어 속도도 다르다. ‘빠른’ 학습자나 ‘더딘’ 학습자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즉, 학습 속도를 학습 능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반박의 여지없는 오류이다


 이렇게 오늘날 교육은 학생들에게 고정된 학습 속도를 강요함으로써 수많은 학생들의 학습 능력과 성취력을 인위적으로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좋은 평가를 받아 혜택을 봤던 그 결과들 가운데 단지 시간 상 우연의 일치 덕분이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요즘 아이들을 보면 ‘수포자’가 많이 있다. 많은 아이들이 수학을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학생들마다 학습 속도가 다르며 강점을 드러내는 모듈 및 단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정된 학습 속도에 따라 학습을 강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고정된 속도에 맞출 수 있어야만 정상 범위(평균)에 속할 수 있다고 강요당한 아이들은 지쳐서 포기한 게 아닐까?


 이 세상에는 발달의 사다리란 없다. 사다리라기보다는, 우리가 각자의 발달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렇게 개개인성을 존중한다면 개개인성에 따라 새로운 가능성을 온갖 형태로 펼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개개인의 패턴이 달라도, 상황이 달라도(금수저이든, 흙수저이든) 언제든 뛰어난 아이디어를 낼 수 있으며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꼭 성공한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가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로의 원칙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경우든 자신만의 경로를 처음으로 내고 그 길을 닦으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 우리가 겪는 모든 상황들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서있는 이 길이 올바른 길인가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개개인성과 얼마나 잘 맞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메타인지를 높이고 자신이 선택한 길이 가장 유용한 길이라고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장 유용한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들쭉날쭉의 원칙(지루함을 견디지 못하지만 흥미를 느끼는 부분에선 초집중을 할 수 있는 성격), 맥락의 원칙( 어떠한 상황에서 초집중할 수 있는지), 경로의 원칙 (들쭉날쭉의 원칙과 맥락의 원칙을 바탕으로 가장 유용한 길 선택하기) 이렇게 3가지 원칙이 만나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괄호 부분은 예로 든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특별하다. 이것이 개개인성의 핵심이다. 개개인성 원칙들을 이해하면 삶의 통제력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다 당신 스스로 평균 점수가 보여주는 당신이 아닌, 있은 그대로의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개개인성의 원칙으로 성장하는 기업>


 기업들 중에는 테일러주의 사고방식을 채택하여 직원들을 통계적으로 다루며 쉽게 대체가능한 인력자원으로 취급한다. 반면에 직원들의 들쭉날쭉성을 이해하고 직원들 각자의 능력을 펼칠 만한 특정 맥락과 조화시키는 일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직원들이 독자적 경로를 추구하도록 북돋워준다.


 인도 최대 IT기업 조호 코퍼레이션의 창업가 스리드하르 벰부는 인재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개개인성을 추구하였다. 실제로 보니 학력(성적과 채용 심사자의 견해에 따른 취득 학위의 수준)과 실무 수행력 사이에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주 미미할 정도의 관계가 있거나.. 대학 학위가 채용의 필수 조건일까? 벰부는 빨리 배우는 것과 성공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개개인을 개개인으로서 존중하고 대우하면 들인 공보다 더 큰 결실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벰부는 지금의 조호를 얻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에 대한 통제력을 가질 때 가장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교육을 바꿔라>


 우리가 최상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 대학의 학위를 받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는 이유는 좋은 직장, 높은 연봉, 좋은 이웃과 여유 있는 삶을 즐기기 위한 최상의 조건이며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선 세대로부터 평균주의를 물려받은 대학들은 개개인보다 평균주의를 더욱 강조하며 교육과정의 표준화를 강조하고 있다. 즉, 현재 고등교육은 표준화된 커리큘럼에서 수행력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등급을 매기고 있다. 모든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하되 더욱 뛰어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한 인생으로 가는 올바르고 유일한 길은 자신의 독자적인 개개인성을 이해하고 발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개개인성은 철저히 무시하고 감추는데 급급하다. 특히 학생들과 학부모가 말이다. 이렇게 몰고 가는 평균주의 교육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1. 학위가 아닌 자격증 수여

2. 성적 대신 실력 평가

3. 학생들에게 교육 진로의 결정권 허용하기


 단계적 자격증 수여를 기반으로 통합 자격증을 수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적성에 맞지 않는 전공을 택하는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다. 단계적으로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적성에 맞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단계적 자격증을 통하여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한 길이 잘 맞다고 판단이 섰을 때 취득한 단계적 자격증을 통해 통합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합 자격증을 취득 함으로써, 우리들은 실력을 쌓고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즉 단계적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실력을 쌓고 단계적 자격증들이 모여 통합 자격증을 취득함으로써 실력을 입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실력 중심의 평가들로 통해 직업과도 연계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학생들이 배우는 것과 실제 직무에서 성공에 필요한 자질 사이에 밀접하고 유연성 있고 실시간적인 조화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교육을 받기 위해선 학생들에게 교육 진로의 결정권이 주어져야 한다. 자신의 들쭉날쭉성, 맥락적 기질 예산 등을 계산하고 자신이 관련 지식 기량 능력을 숙지하는데 유용한 자격증 경로를 선택하는 것이다. 테일러주의 공장 모델 교육시스템에서 벗어난다면 학생들은 다른 사람들 모두와 똑같되 조금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쓰는 대신에 최고의 자신이 되기 위해 힘쓸 것이다.


<평균주의를 넘어>


 맞춤이 기회를 만든다 환경이 개개인에게 맞지 않으면 그 환경이 조종석이든 교실이든 전망 좋은 고급 사무실이든 간에 자신의 진정한 재능을 펼칠 만한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다.


 평균의 시대 동안 우리는 기회균등을 ‘평등한 접근권’, 즉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경험을 접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해왔다. 하지만 평등한 접근권은 그 시스템이 잘 맞든 맞지 않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은 표준화된 시스템에 접하도록 함으로써 개개인의 기회를 평균적으로 최대화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는 점이다.


 개인들은 수세대에 걸쳐 성, 종교, 인종, 성적성향, 사회 경제적 계층을 이유로 차별당해왔다. 그동안 이러한 차별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은 기회균등의 정도를 평균적으로 균형 잡으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평균적인 사람 따위는 없다는 것을 안다. 또한 평등한 접근권이라는 방식에도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안다. 평균적인 사람이 없다면 평균적으로 평등한 기회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평등한 맞춤만이 평등한 기회의 밑거름이 된다.


 링컨은 정치의 주된 목적은 “인간의 처우를 향상하는 것, 즉 모든 이의 어깨를 짓누르는 인위적인 짐을 내려주고 모든 이가 가치 있는 이상을 추구하도록 길을 닦아주며 모든 이가 인생이라는 경주에서 자유로운 출발과 공정한 기회를 누리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평등한 맞춤은 우리의 조직들이 우리의 소중한 가치를 보다 밀접히 조율되도록 이끌어줄 이상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최고의 자신으로 도약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의 훌륭한 삶을 추구하도록 그 기회의 문을 열어준다.


 원래 아메리카 드림은 부자가 되거나 유명해지는 것과는 상관없는 말이었다. 그보다는 잠재력을 한껏 펼치며 살아갈 기회와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차원의 문제였다. 현재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되 더 뛰어나길 요구하는 한편 아메리칸드림을 주위 사람들과 비교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옹졸한 꿈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일차원적 사고, 본질주의적 사고, 규범적 사고의 장벽을 극복해낸다면, 또 사회의 조직들이 평균보다 개개인성을 중요시 여긴다면 개인의 기회가 더욱 증대되고 성공에 대한 생각도 바뀌게 될 것이다. 평균에서의 이탈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정한 관점에서 성공을 바로 보게 될 것이다.


 이제는 시스템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개개인성을 중요시함으로써 평균주의의 독재에서 해방돼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밝은 미래가 펼쳐져 있으며 그 시작점은
평균의 종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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