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빠방에서 잘 거야!'
이 말을 해석하자면,
딸아이가 채점한 아빠의 육아 성적표가 아주 좋다는 말이다.
음식, 역할놀이, 위생청결 관리 등 모든 영역에서 딸아이의 욕구와 기대 수준을 어느 정도 충족 했기에 그 선물로서 보상으로서 아빠방에서 함께 자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매번 최상위 성적표를 받아 들고 자랑하고 싶지만 이는 대한민국 어느 부부에게도 결코 쉽지 않다.
여보, 나 이제 퇴근 중, 혹시 애들은 자고 있나요?
맞벌이 부부의 고달픈 마음이 질문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물론 많은 시간을 자녀와 함께 해주지 못하는 워킹파파, 워킹맘들에게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나가는 아들, 딸의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고 이쁘지만, 때로는 지친 퇴근길에서 조용하게 자고 있을 자녀를 간절하게 상상해 본 적도 있었 음을 나부터 솔직하게 고백한다. 아마도 역할갈등으로 두 가지 이상의 역할이 충돌하여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상당히 버거울 때였던 것 같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라는 말처럼 체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되어야 자녀에게도 자연스러운 미소와 세심한 보살핌이 찐으로 나온다. 피곤할 때 나오는 부모의 억지웃음과 바이브는 아이들이 금방 알아차린다. 이때는 내 감정부터 차분하게 다스려야 경험 상 큰 탈이 없다.
<나의 역할 목록>
모두가 기피하는 업무를 맡아서 조용히 잘 처리하고 동료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능수능란한 프로 직장인
원하는 거 잘 사주고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매사에 친구 같은 아빠, 낄끼빠빠 잘하는 아빠
가사 및 육아에 적극적이고 요리도 잘하며 아내에게 작은 일도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평소에 감정 표현 잘하는 남편
수시로 양가 부모님께 전화드리고 병원 잘 예약해서 모셔다 드리는 아들, 사위, 정기적으로 핫플레이스 검색해서 효도 여행 함께 떠나는 아들, 사위
생산자로서 매주 1편씩 글 발행하는 꾸준한 브런치 작가
주 2~3회 건강 관리를 위한 헬스장 출석 및 다이어트
친한 친구의 하소연을 1~2시간씩 들어주는 인생 상담사
10분 전에 나와서 자녀의 앉은자리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손 흔들며 눈웃음으로 맞이하는 유치원 버스 등하원 도우미 등
우리에게 부여된 이와 같은 다양한 역할들이 공항순환버스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적확하게 맞아떨어지고 계속 일정하게 순환된다면 각 역할들에 대한 개별적 성적표가 지금보다 훨씬 좋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맞벌이 부부의 애정 지수도 한층 올라갈 듯하다.(부부 사이에는 '당신 때문에' 보다는 '당신 덕분에'라는 마인드 장착이 필수다. 부부 존중감 없이 서로 탓만 하다가는 결국 망한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뒤죽박죽이다. 1. 업무 보고서 쓰는 도중에 유치원에 등원했던 딸이 갑자기 열이 난다고 전화가 오고, (유치원 선생님 말씀으로는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지 않는 관계로 전화를 하셨단다. 진짜로?) 2. 진중한 회의 시간에 부모님의 생활 문제 해결 요청 문자가 온다. (홈쇼핑 결제 요청, SNS 가입 방법 문의 등) 3. 그 와중에 와이프는 '오늘 야근 각이네 , 애들하고 저녁 맛있게 먼저 챙겨 먹어' 라며 선방? 날리는 카톡이 오고 4. 아들은 퇴근할 때 공룡 그림을 잊지 말고 꼭 뽑아와 달라고 장문의 그림 문자가 온다. 가장으로서 가족 구성원의 마음과 의도가 이성적으로 는 이해되지만 마음은 쉬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마음의 여유가 생각보다 없다.
이렇게 업무의 집중도와 마음의 평화가 한번 깨지고 나면, 심리적으로 아주 옹졸해진다. 효율적으로 문제 해결 방안을 찾기보다는 순간순간의 생각과 행동이 뾰족해진다. 눈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손은 기계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만 머릿속은 직장과 가정에서의 나의 현재 손익계산서 와 대차 대조표를 만들어 가며 섭섭한 마음이 드는 대상과 화풀이할 지점들을 찾는다. (이런 심리적 패턴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
내가 그동안 너무 가정적인 남편으로 수용만 하고 살았나? 아내가 남편을, 자녀가 아빠를 너무 당연하게 희생해도 되는 존재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가? 나는 돈 버는 기계에 불과 한가?라는 불손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리를 잠식한다.
요즘 시대는 아빠가 육아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함께 하는 시대인데,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보고 자란 관계로 무의식적으로 체득하게 된? 고약한 습성들이 힘들고 섭섭할 때마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드는 것이다. 가부장적이며 남성 중심 문화의 산물인 집단적 세뇌 효과는 이렇게나 끈질기며 한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무섭다.
근데 직장에서 우리는 왜 뾰족해지는 걸까?
회사 퇴근길에서
생각해 본다.
나의 고유성과 개취는 지운채 이불 밖의 직장에서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고, 꼴 보기 싫어도 꼭 봐야만 하는 존재가 있으며,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비효율적인 업무프로세스도 그대로 따라가야만 한다.
그게 바로 사회의 법칙이고 회사의 룰이며 그렇게 자신을 지운채 사회 속에 길들여짐에 대한 대가를 우리는 금전으로 보상받는 거니깐 말이다.
타인의 존재에 대한 최소한의 매너 없이 일방적인 사람들, 걱정하는 척, 격려하는 척 무언가를 캐내려는 사람들, 감정 쓰레기통으로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애매한 업무에는 절대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사람들, 끊임없는 신경전 속에서 상처받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편린과 감정들은 직장인 모두가 일상적으로 겪는 스트레스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조금씩 잃었던
내 본질적 자아를 되찾는다. 그렇게 서서히 화의 실체를 알아차리고 예민했던 상황들이 조금씩 이해되면서 분노는 가라앉는다. 직장에서는 우리 모두 무의식적으로 페르소나 를 쓰고 악착같이 연기하고 있는데, 집에서 연락이 오면 잠시 라도 본래적 자아를 다시금 꺼내야 하기에 한껏 예민해졌던 것이다.
암튼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중년이 되어서 매일밤 딸에게 5세 육아 케어 만족도 결과표를 받는다. 검증의 칼날은 사회의 그 어떤 테스트보다 날카로운데 이는 아이들이 감정에 솔직하고 무엇보다도 진실되기 때문이다. 이게 뭐라고... 오늘도 나는 딸아이에게 선택받기 위해 퇴근 후 육아에 최선을 다한다. 아마도 또 다른 인정욕구가 건드려지는 것 같다.
때론 딸아이가 무섭다. 집안의 판세를 다 읽고 아빠의 심리까지 다 읽고 있는 것 같다. 자기에게 조금만 소홀하다 싶으면 냉정하게 돌아선다.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말이다.
근데 만족도 조사 항목을 절대 안 가르쳐준다. 체크 리스트를
알아야 그에 맞춰서 '맞춤형 돌봄 케어 서비스'를 시행해서
성과등급을 높이고 부진한 항목들은 획기적 개선을 할 텐데... 말이다. 어쩔 수 없다. 딸아이 눈치를 보며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조금씩 메모하면서 종합적으로 추측해 나가는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맞벌이 부부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