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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부커 Aug 06. 2023

그래요. 나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입니다.

부임 인사 가는 날의 단상

맙소사,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부임 인사 가는 날


지난밤 잠자리에 들기 전 부임 인사 갈 때 입을 후보군 옷들을 눈으로 스캔하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었는데...

(나는 그날 입은 옷이 맘에 안 들면, 일할 때 몰입도가 현저히 떨어진다.ㅋ)


미래기억이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 건지 '오늘은 와인색의 폴로 카라 티셔츠와 네이비 계통의 밴딩 슬랙스 바지를 코디해서 잘 입자'라는 생각과 함께 눈이 번쩍 떠였다.


신기하게도 우리의 뇌는 잠자리에 들기 전 가볍게 질문을 던져 놓으면 아침에 생각지도 못한 답안들을 찾아준다.

(흡사 늦게 들어온 날 건조기에  모아둔 빨랫감을 몽땅 집어던져 넣어 놓고 한숨 푹 자고 나면 뽀송뽀송한 빨래들을 아침에 기분 좋게 대면하는 장면비슷하다.)


암튼 그건 그렇고 동시에 불순한 생각 하나도 제 차례인지 눈치를 보아가며 기지개를 덩달아 편다.

"빌어먹을 누가 정식으로 출근도 하기 전에 미리 부임 인사 가는 관행들을 만들어 놓은 거야" 마무리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요즘 업무 인수인계도 전자
시스템으로 담당자 간에 결재하고 간단하게 끝내는데...
인사 안 가면 뭐 불이익이라도 줄 건가? 그래도 주변 사람들 다 가는데 나만 안 가면 좀 그렇지 않아?
혼자 자문자답하며 황급히 시계로 고개를 돌린다.

사실 현재 근무 중인 학교에서  이륙하려고 하는 자는

밥그릇에 눌어붙은 밥풀처럼 눈치가 보이게 마련이고,


미래 근무 예정인 학교에 막 착륙하려고 하는 자는

다 먹은 밥그릇에 부어놓은 물처럼 정체성이 희미한 법이다.


양쪽에서 이방인 취급 당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이다.ㅋ

(공무원 경력 10년이 지나도 인사발령 때마다, 이런 뭣 같은 기분은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다.)


다행스럽게도 갖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형성해 둔 아침 루틴 덕분인지 신체반응이 부정적이고 게으른 생각들을 멀찍이 앞질러서 기계적으로 실행되기 시작한다.


먼저 내 방의 모든 창문들을 활짝 열어젖혀 유무형의 갇힌 것들을 비워내 신선한 바깥공기로 몸과 마음을 채워본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도화지 같은 순백의 하루가 나에게 다시 주어졌음에 무한한 감사함을 입 밖으로 뱉어 본다. 그리고 물 한 컵과 아침 독서, To-do-list 작성으로 하루를 스케치하며 디자인한다.


어디 보자~~~

오늘 부임 인사 동행은 교장, 행정실장님께서 같이 가기로

하셨지(나는 기질상 패거리 문화를 안 좋아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혼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건만~~

(나의 일로 두 분께 저~얼대~부담드리고 싶지 않다.)

(대부분 동행자 출장비도 없고 개인 연가 사용한다.)


교장, 행정실장님은 섭섭해하신다.

(나를 배려한 고도의 연기인가? 아님 타학교 커피가 그렇게 맛있다고 관내에 소문이라도 났는가?)


그래도 사람 사는 게 그게 아니라고 하신다. (why not??)

(암튼 끝까지 신경 쓰이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동행했다고 그 사람의 인격이 보증되고

귀한 대접을 받는 게 아닌데도 왜 이런 관행들은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걸까. 지금 내 위치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사실 몇 년 전 단설 유치원 근무 시절,

원장선생님께서 인사발령이 고향 가까운 곳으로 났는데, 유치원 친화회 회원 대부분이 이바지 음식, 떡과 함께 따라가는 것을 실제로 목격했었다. 그분을 존경하고 근무기간 동안 개인적으로도 좋은 인간관계를 맺었었지만 결국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경험칙상 부임인사 때 1~2정도 동행이 스탠더드이다.

근데 무슨 상견례 자리도 아니고 서로 마음에 안 들면 당장 오늘내일 헤어질 것도 아니지 않은가?ㅋ


물론 현장에서 인수인계도 필요하고, 직원의 특성, 평판 등

말 못 할 사정들도 동행자가 얘기해 주는 등 여러 가지 현실적 필요성도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모두 원활한 업무수행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겠지만,

진짜 사이가 안 좋아서 아무도 따라가지 않거나

스케줄이 안 맞아서 부득이하게 못 따라 간 경우에 그 당사자는 괜한 오해와 뒷소문, 낙인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편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모적인 오래된 관행과 조직문화들은 조금씩 개선해 나가자.(요즘 공직 문화에 MZ세대의 가치관이 점점 반영되고 있지 않은가? 과감한 혁신도 필요하다.)


공무원은 인사 발령에 따라서 당연하게도
부임지에서 근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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