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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면 Sep 30. 2018

싱가포르 대 낮에 당한 소매치기

 누가 싱가포르를 가장 안전한 도시라고 했는가? @Singapore

이상한 호스텔

 세부 어학원이 끝나갈 때 즈음, 비자 연장을 위해 가장 가까운 (=싼) 싱가포르로 비자 트립을 다녀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숙소 예약 어플에서 가격순(낮은 순)으로 정렬을 하고 그중에서 별점 높은 곳으로 대충 선택했다. 그런데 이 게으름이 화근이 되어 소매치기라는 빅 이벤트를 치르게 되었다.


 내가 고른 숙소는 지하철 Rechor역에서 10초 거리에 있는 역세권 호스텔이었다. 창이공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1번 환승 후 도착할 수 있었다. 걷지 못하는 병을 앓는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숙소에 헤매지도 않고 바로 입장.


싱가포르 Rechor역 바로 앞에 있는 호스텔. 아마 호스텔을 빙자한 고시원인듯.


근데 이 숙소 뭔가 기운이 이상하다. 여행객들이 붐비는 활기찬 호스텔 로비의 느낌보다, 고시원의 느낌이 물씬... 체크인하려고 호스텔 카운터에 갔더니, 스텝도 고시원 총무 느낌 물씬...? 음. 그래 내가 너무 일찍 와서 그런 거겠지? 했다. 예약한 8인 1실 혼성 도미토리 키를 받고 부푼 마음으로 방 문을 열었다. 같은 방을 쓰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암 프롬 싸우스 코리아'라고 말할 준비와 함께.


 문을 열었는데, 뭐지 이 스멜은? 왜 아저씨 냄새가 나지? 하고 둘러봤더니, 옆 침대를 쓰고 있는 커플을 제외하곤 모두 남자. 그리고 그분들은 여행객 포스가 아니라 로컬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장기투숙객. 숙소 선정 미스라는 판단을 하기까지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후배에게 들어보니, 그 동네는 싱가포르에서도 치안이 안 좋다고 소문난 '리틀 인디아' 근처였다.


대 낮에 당한 소매치기

 에이. 그럼 밖에 나가서 놀면 되지 뭐- 하고 빠르게 멘탈 정리 및 합리화를 시도했고, 짐만 겨우 풀고 나갈 준비를 했다. 없는 살림이지만 도시에 왔으니 예쁘게 차려입고 싶었다. 여행 와서 한 번도 안 입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100년 만에 풀메이크업도 했다. 로비에 앉아있는 고시원 총무 같은 스텝에게도 나 다녀올게- 하고 최대한 상큼하게 인사까지 하고 호스텔을 나섰다.

문제의 롱 원피스. 바지였으면 더 빨리 뛸 수 있었을 텐데.

 호스텔을 나섰지만 계획은 1도 없었기 때문에 호스텔 문 앞에 서서 어딜 갈지, 뭘 먹을지- 등 멍 때리기 타임이 시작되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인도계로 보이는 빨간 티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를 보면서 걸어온다.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면서 걸어오는 그분(?)이 내 휴대폰을 들고 튈 소매치기 새끼라는 걸 1도 직감하지 못한 채, 나는 그냥 그 빨간 티 입은 남자를 쳐다보며 칠리크랩을 먹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찰나의 순간도 아니었다. 10M 멀리서부터 나를 보며 나를 향에 걸어오는 그 빨간 티의 남자가 내 앞에 오는 것을 너무나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고, 그 빨간 티 남자는 내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면서 뭐라고 했다. 손을 내밀며 뭘 달라고 하는데, 그 남자의 발음이 된 발음이라 못 알아듣기도 했거니와, 줄 것도 없어서 '쏘리-'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안 가고 내 앞에서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그의 눈은 내 가방을 향해 있었다. 그리더니 내 앞으로 완전 가까이 다가오더니 크로스로 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 손을 집어넣더니 내 핸드폰을 덥석- 잡는 것이다.


평일 대 낮에 이 거리에서 어떻게 소매치기를 대놓고 할 생각을 했을까?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일세...


(사실 여기서부터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지???????????????? 아니 이렇게 대놓고 훔치면 어떻하란말이지? 넘나 당황했지만, 본능적으로 뺏기지 않으려고 몸을 숙이고 내 핸드폰을 들고 있는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나는 "노!!! 노!!!" 하면서 그놈과 힘겨루기 한판을 했다. 15초 정도 실랑이를 했을까? 결국 나보다 힘이 더 센 그놈의 승. 그놈이 내 폰을 가지고 튀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놈의 백팩을 확- 낚아챘는데, 그놈이 그대로 뛰어가버리는 바람에 앞으로 철퍼덕 넘어지는 꼴이 되었다. 갓뎀...


목청이 터져라 왜쳐EE뤠드원

 넘어지는 순간 빡이 쳤다. 무서움보다는 너무 화가 났고, 그냥 저 놈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놈을 따라 뛰었다. 소리를 질렀다. "레드 원!!! 레드 원!!!" 한국이 아니라서 '소매치기야! 소매치기야!' 할 수도 없었고, 사실은 소매치기가 영어로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입에서 나온 말이 'Red one(레드 원)'이 었던 것 같다. 우렁 찬 내 목소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조용한 평일 낮의 동네가 나의 괴성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살려주세요~' 하는 가녀린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한 마리 야수의 괴성이었다. 뤠드원!!!!!!!!!!!!뤠드원!!!!!!!!!!!!!


마치 영화 추격자의 하정우가 된 기분이었다. 4885 버금가는 제보자 행인1에게 늦었지만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아마 그놈도 뛰면서 내 목소리에 많이 놀랐을 거다. 내 목소리가 큰 줄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큰 줄은 처음 알았다. 그놈을 따라 그놈이 사라진 지하철역 옆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놈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영화 추격씬처럼 여러 갈래의 골목이 나에게 놓여 있는 상황. 그 순간, 지나가던 행인 1이 손가락으로 저쪽!!! 하고 알려준다. 감사의 인사도 못 드리고 그놈을 다시 뒤쫓아갔다.


 50M쯤 뛰었을까? 이 바보 같은 소매치기가 큰길로 나가는 거다. 나는 진짜 젖 먹던 힘을 다해 전방을 향해 해병대 함성에 버금가는 괴성을 질렀다. "루 ㅔ 드 원!!!!!!!!!!!!!!!!!!!!!!!!!!" 나의 해병대 함성을 들은 큰 길가의 행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잡아! 잡아! 소매치기다" 정도 그런 말들이었던 것 같다. 그놈을 따라 나온 큰 길가에는 행인 2 슈퍼 아저씨 있었다. 아저씨는 저기저기저기~~~ 하고 손가락으로 그놈이 있는 곳을 알려준다.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빨간 티를 입은 레드원(?)이 용감한 시민 1,2에게 제압당해 팔이 꺾여 땅과 볼 키스하며 누워 있었다.


 뒤 따라온 행인 2 슈퍼 아저씨는 내 손에 물을 쥐어 주면서 "돈워리 돈워리-" 했다. 경찰에 신고를 했으니, 곧 올 거라고 나를 위로해주는데 그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눈물이 나는 거다. 그 소매치기 새끼를 잡아준 용감한 시민 1 아저씨도 내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이거 네 거지?" 하고 물어보는데 진짜 왜 이렇게 눈물이 나냐. 울면서 땡큐 우우 우웅 ㅠㅠㅠ 떙큥ㅠㅠㅠㅠ 하고 있었는데 발이 뜨거웠다. 발을 봤더니, 내 신발이 한 짝이 없네? 한여름 달궈진 아스팔드 바닥을 맨발로 뛴 거다. 가방엔 지갑도 없고. 하-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까 그놈을 잡다가 넘어졌을 때 신발도 벗겨지고 지갑도 떨어진 것이다. 용감한 시민 1,2와 슈퍼 아저씨께 '조금만 잡고 있어줄래?' 양해를 구하고, 다시 허겁지겁 사건 현장으로 뛰어갔다.


그래도 선진국은 선진국이여.

 싱가포르 그 난리를 치며 추격하는 데에 족히 5분은 흘렀을 텐데, 까만 지갑도 내 신발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심지어 지하철 역 앞이라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는데 누구 하나 손도 안 댄 느낌이었다. 그 순간의 긴박함을 그대로 알려주듯 나뒹굴어져 있는 신발과 지갑을 주섬 주섬 주워 담았다. 한 여름의 싱가포르, 대 낮의 추격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슈퍼 아저씨를 비롯해 범인 검거에 도움을 주신 싱가포르 시민 남자분 2분들은 경찰 조사 끝날 때까지 증언을 해주시고 자리를 지켜주셨다. 긴장이 풀려 주저앉아 덜덜- 손을 떨고 있는 나에게 사무실에 들어와서 앉아 있으라며 불러주신 할머니와 가족분들. 사무실 안에서 반창고를 붙여주시던 아주머니. 시민의식은 물론이거니와 마음까지 따뜻한 싱가포르 시민들.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한국에서도 안 써본 폴리스리포트와 혈투(?)의 흔적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한 싱가포르 경찰과 뒤따라 들어오는 구급대원들. 어쩌면 자국민도 아닌 외국인 관광객이 소매치기를 당한 것도 아니고, 당할 뻔 한 사고였는데도 불구하고 빠르고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시스템이 인상 깊었다. 나를 조사하던 남자 경찰이 다리에 난 상처를 보더니 여자 경찰에게 부탁해 대신 내 다리의 상처를 확인했고, 과하다 싶을 만큼 많은 장비를 들고 온 구급대원들은 내가 단어를 몰라하자 통역이 필요하면 통역을 불러준다고 까지 했다.


 그 이후로도 경찰이 아닌 전문 조사관이 찾아와 아주 자세하게 조서를 쓰는가 하면, 국제부 소속 경찰관이 당일 밤에 숙소로 찾아와 추가로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 레드원 소매치기는 말레이시아 국적의 사람이라 사건이 국제부로 이관된 것 같았고, 이관받은 담당자들이 다시 한번 사건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아마도 나를 찾은 것 같다. 레드원 소매치기는 말레이시아로 강제추방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순간 '내가 너무 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합의를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내가 상해를 입었기 때문에 더 큰 형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다.)


 여행 중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아니... 싱가포르에서 대 낮에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싱가포르에서 당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내 기분을 설명하자면 아! 망할 싱가포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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