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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곱슬머리 Sep 13. 2024

5. 미안해… (1)

“아가씨, 다름이 아니라...”


무슨 말이 그리 어려운지 뜸을 들인다.


“언니, 말씀하세요.”


민정이는 분명히 아쉬운 소리가 나올 걸 알지만, 애써 태연하게 기다렸다.


“오빠는 기다려보라 하는데 내가 사정이 있어서요. 정현네가 어머니 병원비를 아직 안보내서...”


전화 너머로 어떤 얼굴일지 그려졌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건 전화임은 분명했다. 알아주지도 않을 배려로 손해 보기는 싫었기에 결국엔 이루어진 통화였다.


“ 아, 언니 미안해요. 이것저것 바쁠 텐데. 제가 전화해서 보내라고 할게요.”


직접 전화를 걸 수도 있었을 거였다. 당연히 보내지 못한 병원비에 배려를 바랐을 거였고, 자신들도 아쉬웠기에 그럼에도 안된다고 거절할 자신이 없었기에 민정이에게 연락한 거였다. 괜히 동서끼리, 형제끼리 의가 상하는 것보다는 싫은 소리가 오가도 곧 회복할 민정이였기에, 게다가 민정이는 거절을 못할 거였고, 배려를 할 거였고, 그래서 결국에는 정현네의 할당은 민정이 몫이 될게 빤했다.


민정이는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네의 빠듯함과 동생 가족의 여유 없음에 민정이는 숨이 막혔다.


“나야, 많이 바쁘니?”


아무 의심 없이 시작하고 싶었지만, 감정은 숨겨지지 못한 것 같았다.


“괜찮아, 누나 말해”


“너, 엄마 병원비는 제때 보내니?”


민정이의 말에 민재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깜빡 잊었다. 자신들의 하루하루가 버거워 놓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미안했다.


“요즘 정신이 없었어. 곧 보낼 테니까 걱정 마”


“오빠네도 여유가 없으니까 제때 보내”


그냥 거기서 알았다는 말로 멈춰야 했을까. 민정이의 말에 민재는 짜증이 났다. 자신의 힘듦을 알아주지 못하는 가족들에게 서운했고,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런 감정정도는 표현해도 될 것 같았다. 가족이니까.


“여유 있는 누나가 좀 더 내면 안돼? 왜 꼭 똑같이 내야 해? 능력 있잖아, 누나”


민정이는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니 더 이성적이 되었고 냉정해졌다.


“약속은 지켜. 이번에는 내가 보낼게”


민정이의 목소리에 민재는 미안함을 말했다.


“누나, 미안”


민정이는 전화를 끊는다는 말을 겨우 했다.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터져 나왔다.


엄마는 늘 그랬다. 오빠와 동생의 앞길을 막는 너무 잘난 딸이라고. 민정이는 그 비난이 매번 자신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민정이는 버텼다. 엄마가 민정이 자신을 비난하고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봐도 버텼다. 오빠의 아픔이 더 컸기에, 동생이 어쩔 수 없이 느껴야 되는 부족함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민정이는 그렇게 견뎌냈다. 가끔 그 모든 게 진짜 자신의 탓인 것처럼 민정이는 자책했다.


그래도 괜찮았던 건 그런 눈빛은 엄마만의 것이었다. 그래서 민정이는 엄마의 그런 눈빛만 안 보면 되었다. 아니 못 본척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눈빛은 어쩔 수 없이 세뇌당해 주위로 결국 옮아갔다.


“누나는 다 잘하잖아. 내가 못하는 게, 안 되는 게 내 탓이야? 이게 다 누나 때문이잖아”


민정이는 그때 동생의 말을 듣고, 지금껏 자신이 억지로 잡고 버티던 그들에 대한 미안함을 그렇게 놓아버렸다.


다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였다. 동생을 말리던 오빠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아빠도, 동생을 달래던 엄마도 같은 눈빛이었다.


민정이는 일어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들의 침묵이 민정이의 등에 비수가 되어 박혔다. 아팠다. 눈물도 안 날 만큼 아팠다.


민정이는 늘 아프고 의기소침한 오빠와 잘난 누나 다음이라 비교당해 주눅들던 동생과 달리, 건강하고 당당했다.


민정이는 태어나길 빠릿빠릿하고, 하나를 보면 그 이상을 터득하고, 단단하고 야무졌다. 어딜 가도 내세울만한 딸이었지만, 딸이었기에 엄마의 미움을 받았다.


엄마는 딸 많은 집에서 태어나 당연히 눈치 받고, 구박받고, 미움받았다. 아무 상관없는 누군가들도 딸 많은 그 집의 모든 딸들을 천덕꾸러기로 여겼고, 아무 상관없는 누군가들은 분명히 그럴 자격이 없었지만, 그들도 그래도 되는 것처럼 그 딸들에게 눈을 흘겼다.


당연하지 않은 시선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온 엄마의 세대였다. 아무 잘못 안 했지만, 모든 게 딸인 자신의 잘못 같았고, 가끔 다른 집에서 딸을 연속으로 낳았다는 소식은 안타까움과 설명할 수 없는 통쾌함으로 범벅이 되곤 했다.


엄마는 첫째 아들 민석이를 낳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고, 지금껏 구박받고 눈치 받아 움츠려있던 어깨도 펴지는 것 같았다. 비록 자신은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빌어먹을 저주 같은 딸이었지만, 이제는 아들을 낳은 세상 당당한 여자가 되었다.


민정이를 낳고, 민재도 낳고. 이 정도면 성공한 것 같았다. 아들을 둘이나 낳은, 딸로서의 끔찍했던 시간들이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을 자신의 자랑이었다.


민석이는 자주 아팠고, 민재는 자주 자신감을 잃는 것 같았다. 민정이가 너무 잘났기에.. 주위에서는 민정이가 아들이었어야 한다고 수군거렸다. 아들들이 영 신통치 않다는 말은 자신이 딸로서 받은 비난보다 더 가슴 아팠다. 민정이가 미웠다. 다 민정이 때문이었다.


잘난 민정이를 미워하면, 그래서 그 잘남을 눌러주면 아들들의 기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아 딸이 가끔 못해내는 것을 더 비난했다.


그 대신 운동회 때 달리기를 잘해도 모른척했고, 시험을 잘 쳐와도 칭찬 한 번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딸의 기가 꺾일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매번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딸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았다.


아들에 대한 간절함과 안타까움은 민정이의 앞길을 막기 위한 연료로 쓰이고 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간다는 민정이에게 집안 형편 생각 안 하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딸이라고 막말을 했다. 며칠을 혼자 울던 민정이는 최고 좋은 실업계를 점수를 한참 남기며 가기로 했다.


대신 인문계 갈 성적이 모자라는 민재를 어떻게든 가게 했다. 빚을 내서라도 대학도 보내기로 엄마는 혼자서 이미 마음먹고 있었다. 민석이가 안되면 민재라도 꼭 보낼 거였다.


3:1의 싸움은 당연히 3의 승리가 뻔했다. 1의 발악은 어떻게 해도 안될 거였다. 아들들은 의도하지 않았고, 의지도 없었다. 엄마만의 싸움이었고, 민정이는 어쩔 수 없이 그 링 위에 올라가야 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인생은 잔인했다. 매일 기도했고, 매 순간 잘되길 바랐고, 어떻게든 돈을 벌어 조금이나마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원해 주며 사회에 당당하게 한몫하길 바라던, 너무도 잘 키워내고 싶었던 아들들은 그들의 인생에서 헤매고 있었다.


혼자서 무던하게 살아내던 민정이는 모두의 인정을 받았고, 그곳이 어디든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다. 대학은 어쩔 수 없이 포기했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좋은 조건의 은행에 바로 취직했다.


모두의 축하를 받았지만, 앞길 막는 이기적인 여동생이자 누나가 되어버렸기에 엄마와 오빠와 동생의 진심 어린 축하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른 가족들 몰래 연락을 한 아빠의 집 밖에서의 축하는 지금껏 버티던 민정이를 울게 했다. 미안함을 전하는 아빠였고, 괜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민정이였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말하는 민정이에게 엄마는 네가 알아서 가라고, 남의 자식 얘기처럼 했다. 지금껏 민정이가 드린 월급의 일부를 고마워하지 않았던 엄마였기에 이번에도 그렇게 서운하지 않았다.


처음 받은 월급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었고, 기쁘고 뿌듯한 마음에 월급봉투를 내밀었던 민정이었다. 혹시나 엄마가 자신을 대견해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별것 아닌 것에 자존심 상한다는 듯이 네가 알아서 하라는 엄마의 말에 산산이 부서졌었다. 그렇게 마지막 희망이었던 순간이었고, 민정이는 마지막 미련을 접었었다.


결혼을 하고 딸 둘을 낳은 민정이에게 엄마는 아들을 무조건 낳아야 된다고 강요했다. 시댁을 무슨 낯짝으로 볼 거냐고, 한 번도 친정엄마로서 살갑지 않았던 엄마가 그렇게 얘기하자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아들을 바라는 민정이에게 남편은 자신은 괜찮다고, 시부모님들도 그렇게 강요하지 않는다고 바쁜 민정이를 배려했다.


민정이가 받지 못했던 부모님의 사랑을 시부모님들이 채워줬고, 그럼에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은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둘째 딸을 낳은 지 4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분명 행복해야 했지만,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받는 것에 가치를 두는 직장인과 어린 자식들을 챙겨야 하는 엄마로서 매 순간 쉽지 않았고, 자주 지쳐갔고, 어느 순간 우울해졌다.


애써 무시해 왔던, 자신에게 가득한, 엄마에 대한 원망은, 자신도 아들을 낳았다는 기쁨을 누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일상의 불만은 자주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게 했고, 그런 자신을 보게 된 민정이는 다시 우울해져 갔다. 악순환이었다.


그럼에도 민정이가 그 순간을 잘 지나왔던 건 자신을 이해해 주는 남편 덕분이었다. 선한 인상이 마음에 들어 사귀게 된 남편은 사랑도 넘쳤다.


그의 그런 사랑이 어색해 처음엔 그 마음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의 부모님을 만나고 나자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의 부모님과 남편의 공간은 민정이가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남동생이 함께 하는 곳과 닮은 듯 달랐다. 서로를 향해 표현하는 사랑은 닮았지만, 민정이를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달랐다. 아직 아무 사이 아니었음에도 존중해 줬고, 비록 가족이었지만 낯설어했다.


민정이가 애써 들여다보지 않았던 인생의 불만족과 우울함을 그래서 지쳤던 순간을 먼저 알아본 남편은 민정이를 위로했다.


자신의 마음을 미쳐 몰라줬던 민정이는 눈물이 터졌고, 한참을 울던 민정이는 자신의 마음의 빈 공간을 남편의 사랑과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으로 채워갔다.


민정이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가족으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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