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크림 Oct 18. 2021

내가 시한부라면.(下)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못하던 버킷리스트를 하러 떠난다던데. 난 버킷리스트가 없는데 큰일이다. 만들어둬야 하나, 근데 그 버킷리스트를 할까? 하는 고민까지도. 그러니까, 상상할 수가 없어진 거다. 차라리 고양이 쪽이 그럴싸한 상상인 것 같아. 그래도 또 생각해 본다. 만약 그렇다면 한 반년 정도면 딱 적당한 시간 일지도 모르겠다.


일을 하고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이기적이게 한 달을 기다리기엔 제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요. 나쁘겠지만, 다른 분께 인수인계를 맡기고 떠날게요. 하는 이기적인 발언도 해본다면 좋겠다. 아, 상상인데 어떠한가? 해내고야 말 거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쯤 열심히 내가 없어도 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알려주고 나올 거다. 사실 난, 선생님이었으면 좀 잘 가르쳤을 것 같다는 싶을 때가 인수인계할 때다. 그때도 멋있게 가르쳐 주겠지. 이만큼 알고 있는데 나오는 게 그때만큼 아쉬운 때도 없다.

나가는 이유는 내가 백번 천 번도 읊었으면서.


그리고 회사를 나오는 걸음은 어느 누구보다도 가볍기도, 무겁기도 하거나,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없겠지. 걸음마다의 공기도, 내뱉는 숨마저도 간절해질까. 아니, 느끼는 느낌이 달라질 것 같다. 지나가는 이가 들이키는 숨 한 줌도 부러워할 날은 아마 마지막 날이 될 거다. 나만 사라진다면 너무 쓸쓸할 것 같다. 사실 몇 번 상상해 봤는데 너무 쓸쓸하다.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라떼,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 내가 좋아하는 친구의 웃음, 너무 좋아서 어쩜 그렇게 귀엽니? 하면 낯간지러워서 헛웃음 치는 보석 친구의 웃음, 내가 좋아서 잡는 깍지 손의 온도, 까칠하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하고 도톰한 손의 느낌, 내가 쓸어 넘겼던 귀여운 동생의 머릿결, 시간마다 달라지는 밤의 구름, 밤에 나란히 마시던 맥주, 꼬치, 술. 요리 한 가지 하는 것마저도 땀이 나서 틀어야 했던 선풍기 바람, 내가 제일 잘하는 달걀말이를 먹어주는 가족, 반복할 것 같다. 그렇게 반년을 살다가 어느 날 편지를 쓰겠다. 사실, 편지도 얼마나 힘들까, 한 줄도 힘들 것 같은데.


마지막에 줄 수 있는 선물이 고작 편지라서. 제일 예쁜 말만 써서 담아 보내고 싶어도 이내 평범하게 적다 갈 것 같아서. 어느 것 하나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없었다는 뻔한 말도 거기에 하나쯤은 덧붙였을 거다.


넌 너무 예뻐, 소중해, 좋아해, 사랑해. 좋지 않은 것들은 내가 모두 가져갈게, 모두 바깥에 내어다 놔.

저 먼 곳에 내가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묻어둘게. 그래도 찾아가려 들거든 내가 막아줄게.

힘들어하거든 가끔 꿈에 나타나 줄게.

최고로 인생에서 기쁜 일이 생길 때면 웃어주러 갈게. 괜찮아, 안심해.

평생에 걸쳐서 힘들지 않게 노력은 해볼게.

그래도 가끔은 힘듦이 갈 거야. 그래도 너는 강하니까. 나보단 강하니까, 견딜 수 있을 거야.

신이 주는 힘듦을 이겨내면 그다음에 갈게. 너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을 주려 하거든 항의는 해볼게.

좀 손가락질받아도 어때. 그러면 안돼요. 조금만 덜어주세요.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차라리 저 못된 사람에게 더 줘버리란 말이에요! 그래도 안된다고 하면 내가 대신 받아둘게. 좀 무섭지만 네가 받는 고통보다는 여기서 받는 게 조금 더 달게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마지막엔 좋은 것만 담아서 와 줘. 혹은, 그렇게 담고 살고 있어 줘, 내가 다시 갈게.

알잖아, 내가 뭐로 태어나고 싶은지.

너는 뭐를 준비하면 되는지.

말은 못 해도 우리는 알 수 있을 거야.

처음 보는 그날부터 네 발치 아래에서 온 몸을 다해서 반가움을 표시해 줄게.

그럼 그게 나일 거야, 그러면 그때부터 매일 오는 나를 반가워해줘. 하루도 빠짐없이 갈게.

고로롱, 고로롱 소리도 내어줄게. 쥐는 좀 무서워할 수 있으니 가져가지 않을게.

발 만지는 것도, 배를 만지는 것도 싫어하지만 참아볼게.

그러니 내가 소리 내면 문을 열어줘.


작은 박스에 담요 하나만 둬도 좋아.

그렇게 밤을 넘길 수 있게 해 줘.

그러면 나는 사계절 여행을 할 거야.

계절이 변할 때마다 나뭇잎을 물어올게.

네가 계절이 싫어지는 때가 있을 수도 있으니

까먹지 않도록.

가끔 며칠은 안 와도 이해해 줘.


여행은 기본 2박 3일이야.

걱정 마 나는 귀여우니까.

단골집 하나,둘은 만들고 올 수 있어.

너무 뻔뻔스럽다 생각하면…. 이건 좀 그렇긴 한데 생선 물어올게.

아무도 모르게 가져올 순 없지만 좀 곤란스러운 건 참아줘야 해.

어때, 상상만 해도 다시 즐거울 것 같지 않니.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되는 거야.

네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세계 최초 장수 고양이가 될 거야.

그리고 다시 함께 가는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그렇게 마무리할 것 같다.


#사진은 귀여운 주혜가.

작가의 이전글 내가 시한부라면. (上)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