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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 Nov 12. 2021

가을 낭독회는 부끄러웠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와 가까운 존재였다. 오빠와 함께 게임을 하고 자랐고, 때론 컴퓨터로 인해서 싸우기도 했던. 그래서 게임이라는 것에 있어서 유독 거부감 없이 없었고, 즐기는 편이었다.

근데 취미를 게임으로 말하기엔 창피해서, 누가 ‘주말엔 뭐해요?’ 혹은 ‘취미가 뭐예요?’라고 물으면 영화나 독서한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브런치를 알기 전엔 게임을 했고, 독서는 간간이 했지만 그리 자신 있게 대답할 만큼 하지 않았다. 늘 가깝게 하고 싶지만 먼 존재 같았다. 쓰고 싶었으나, 쓰면 이런 글이 뭐가 대수겠어.라고 생각했고, 독서는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흔히 말하는 자기 계발서도 읽어보았지만, 실행에 옮길만한 습관 같은 건 잘 없다고 느껴서인지 책을 보는 것, 그마저도 마다했다. 

모두 브런치 작가가 되기 전, 나의 소박한 일기장 창고가 생기기 이전의 이야기다.     


얼마 전, 게임을 같이 하던 지인에게 글도 쓰고 책도 읽는다고 이야기했더니 금방 돌아온 

질문이 있었다. 내게는 무척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일 년에 책은 몇 권 읽어?

완독은 몇 번이나 해?     


진실로 그러한지 추궁하는 멘트는 아니었다. 그냥, ‘너도 그렇구나! 나도 읽는데. 넌 얼마나 읽어?’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책은 이제야 재미 붙여서 그다지 많이 안 읽었다고 쳐도, 완독을 몇 번이나 하냐는 질문은 꽤 충격적이었다.     


초독이나 완독이나 같은 의미 아니었어?

완독이면 완독이지, 몇 번이나 다시 읽냐고 다시 되물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다시 읽는 재미가 있다고 대답이 돌아왔다. 난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며칠 내내, 어떻게 다시 읽는 재미에 빠질 수 있을까 하는 고찰에 빠져 있었다. 

나는 마치 내가 잘못된 부속품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완독을 몇 번이나 해?

다시 읽는 재미가 있어.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도, 그렇게 대답을 하는 나를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그렇게 끙끙 앓을 때, 내게 요즘 좋은, 선한 영향력을 주고 있는 어른인 대니에게서 좋은 제안이 들어왔다.    

 

같이 글 낭독회를 해보지 않을래요? 

    

대니는, 내가 바라보는 이상적인 어른의 면을 갖고 있다. 

꾹 참는 인내심,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 허를 찌르는 질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유머 센스까지.

요즘 부쩍 친해진 사이이지만 가끔씩 멍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친구가 된다는 건 실로 부끄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좋기도 하다. 

그만큼 내가 내어줄 수 있는 게 있어야 할 텐데 하는 부담도 살짝 있다.     


사람의 좋은 면도 야채처럼 키워다가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이번에 심었는데 수확이 좋아.

그럼, 나는 좋은 걸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 과일처럼 키워서 줄 수 있으면….

사람은 여러모로 어렵다. 좋은 걸 줄 수 있는 건 전부 눈에 보이지 않아.

난 내가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럼 계속 내 곁에 있을 수 있잖아.

그런 생각에 문득 잠긴다.     


어쨌든, 그런 대니의 제안에 나는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단지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글 낭독에 대한 의미를 진지하게 고찰해 보지 않은 채, 수락한 대가는 정말 부끄러움 연속이었다.     


글 낭독을 하기로 한 당일의 오후. 

글을 쓰면 몇 번씩 읽어보기도 한다던 태양 친구의 말도 스쳐 지나가고, 글을 쓸 때 꼭 작가의 서랍으로 넣어 놓곤 소리 내 읽어보고 고친다던 대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이 많았다. 글이 글로 되는 것과, 글이 말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퇴고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아 적당히 타협한 글로 낭독을 하고, 낭독하는 것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 속에서 느꼈던 건, 난 제대로 글을 음미하지 않았구나, 탐구하지 않았구나를 깨달았다.

글이 말이 되는 순간 바람이 될 수도 있고, 꽃이 될 수도 있는데. 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정도면 전부 놓친 거나 다름없었다.     


난 도대체 무얼 읽고, 무얼 느꼈다고 할 수 있지?


이런 부끄러움을 보이는 일기장을 보일 생각 하니 또 아찔하다. 미안해요.

좋은 과일도, 야채도 되지 못했어…. 다음에 올 땐 줄 수 있도록 길러놓고 있을게요 같은 

마무리 소감 멘트를 해놓고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동안 사실 제대로 본 게 없는 건지도 몰라하고. 

새로운 챕터를 열었지만 사실 기쁨보다는 조금 슬퍼졌다.


진짜 야채를 주는 건 아니지만, 과일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이번부터는 제대로 심어놓고 보여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일단 과일부터 정해야겠다. 

아니, 주고 싶은 대상에게 과일을 물어야 하나?     


고민은, 고민은 또… 또, 생기고 말았다.

새로운 일은, 또 그렇게 내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고 말았다.

조금은 부담스러운 고민.     


마음 병원 선생님이 보고 싶다.


#사진은 어제의 낭독회에 보러 와 준 주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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