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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림 Dec 31. 2021

십이월의 마지막 밤


기어코 올해에도 왔다. 종말은 아니지만 오지 않길 바라면서 동시에 반기는 이상한 날.

십이월 삼십일일. 모두가 똑같이 나이를 먹고, 오랜만의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기에 적당한 날.

평범함은 없고 특별함만 묻은 날.     


십이월의 마지막 밤에는 올해는 꼭 제대로 돌아봐야지 했었다.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꼭 돌아봐야지 했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알 수 없는 마음 한 켠의 묵직함은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감정이 얹어져 있다. 연필로 눌러쓴 것 같은 일기장처럼 보일 수 있도록. 꾹, 꾹, 눌러쓰겠노라고 다짐한다.     


무엇부터 풀어나가야 할까. 아팠던 이야기는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했고, 좋았던 이야기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야 할까 고민하는 내 모습이 너무 웃기다.

그래. 조금은 적어도 괜찮겠다. 올해의 마지막 밤이라는 명분이 있으니까.     


올해는 다른 해보다 특별하다. 행복이라는 의미를 알게 되었고, 슬픔이라는 의미를 생애 처음으로 곱씹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들을 천천히 느낄 수 있게 되었을 때 기쁘기도 하여 울었고, 그동안 제대로 알 수 없었던 모종의 이유 때문에도 울었다. 이런 의미였다니. 이렇게 느낄 수 있었다니 하며, 하루를 살아도 기뻐했다. 그 처음을 적을 땐 지금도 이렇게나 벅차다.    

 

그런데 사실 이런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이별 때문이었다. 두 가지의 이별. 하나는 소꿉장난 같은. 사랑 아닌 사랑에 아파하기도 바빴지만, 형제가, 오빠가 결혼하는 해였다. 오빠의 새 출발 이자 가족의 이별이, 내가 드디어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일은 실제로 이어지지 않고 여기에 또렷하게 살아있노라 적고 있지만 그땐 그랬다.      


음, 그래 그럴 것만 같았다. 써놓은 유서대로 갈 수 있는 때가 왔다고.     


그런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점점 더 수렁 속에 빠져들다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지독하게 억울하기도 하고,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지만 남겨질 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마지막 심정으로 마음 병원을 갔다. 정말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내일을 걱정하며 말이다.     


왜 유서를 써 둘 정도로 아팠느냐고 묻는다면, 조금 풀어본다면, ... 아주 조금만 풀어본다면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이가 있었고, 그 사랑할 수 없는 이가, 가족을 괴롭혔고,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랑이 퍽 가여웠고, 쓸쓸했고, 아팠고, 대단히도 쓰려하다 숨을 참다가 토해내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물가의 유혹을, 도로의 유혹을, 칼의 유혹을, 옥상의 유혹을 매일을 느꼈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그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   

그 유혹이, 그 흉터가 온몸에 남아서 때때로 더 마음 아파하는 날이 조금 잦아졌지만 괜찮았다. 기쁨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에 안도하여, 안도하여, 내가 나를 사랑하겠노라고. 사람을 사랑하겠노라고 또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날들이 조금 더 많아졌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해서, 나를 남길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런 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좀 더 그런 유혹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유혹을 가졌던 아이라고 알지 않았으면 하는. 부디 가여움보다는 사랑스러움만을 느껴주길 바랐던 사랑이었다. 그래서 나를 다그쳤다. 잊지도 못하는 그 일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 일을, 아주 없었던 것처럼 굴라고. 아니, 없었던 것처럼 여길 수 있도록 되라고.     

 

그래서 십이월은 바닥을 기어가며 버텨왔다.

연민만은 가지지 말자 했는데 그토록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아픔 때문이라며.

사랑을 해도 그 아픔을 알게 되거든, 사랑하는 사람이 도망갈까 걱정하며 말이다.

이런 것은 하나도 놓지 못했다.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전히도 그런 나를 다독이며 숨을 공간을 내어주는 나의 친구들의 응원과 사랑을, 몹시도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그 사랑스러움을 사랑할 수 있어서 기뻐했고, 울었다.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새로 만난 인연들도 그렇다. 내 이름을 불러주고, 가만히 들여다 봐주며 볼을 쓸어주는 듯한 따뜻함에 가만히 눈을 감고 느끼다 몇 번은 울었음을 사실은, 사실은 비밀이었던 이야기다.

사랑을 주어서 감사했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음이 기뻤다. 너무 기뻤다. 사랑할 수 있으니까.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조금만 더 살아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되고 싶다고 소망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어쩌면, 조금은 엉망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며.    

 

다른 해보다 유독 특별해서 지울 수가 없다. 어떤 이름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특별함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래서 내년엔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내년을 기약하는 내가 좋아서. 이런 말을 남기는 내가 좋아서, 처음으로 십이월의 마지막 밤을 좋아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그럼 결국 돌아본 것은 사랑이네.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네.

또 좋아서 쓸어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나, 사랑이 있었네.

사랑이 있었네. 나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었네. 

조심스레 쓸어보는 것은 아주 소중하다. 머리 맡에 놓인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내년을 다짐해야겠지. 내년을 살아야겠지. 기어코 살아내서 또 한 줄의 이야기를 써야겠지.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하는 건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초조함을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괜찮아.      

흉터를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도 괜찮아, 빨리 벗어나지 못해서 사랑스럽지 못하다고 여기지 말아. 그러지 말아. 읊고, 쓸고, 읊고…. 되고 싶기도 해, 그래도 다음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몇 번의 실패가 와도, 다른 기회가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도 한번 하고. 나를, 나와 약속해야 하는 것도 무섭지만 벌써 해버렸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약속은 이미 해버렸네.     

웃음이 난다. 십이월의 밤이 빛나는 것 같아서.


빛나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어? 

있었구나.     


저무는 십이월의 밤은 아직 네 시간이 더 남았다. 이제 또 사랑을 적으러 가야 한다. 처음 만난 설렘을 안은 사람처럼, 또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남겨야 하기에 힘을 짜내 본다.     


십이월의 마지막 밤의 끝자락, 소리 하나까지 안고 맞이해야지.


새 사랑을 하기 위해서.     

잔뜩 핀 벚꽃처럼 노래해야지.

노래하는 사람이 돼야지.     

안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지.

자랑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러 가야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십이월의 마지막 밤이야.

저무는 밤이야.     


아주 가는 밤이야.

또 오는 밤이야.

또 안는 밤이야.     


십이월의 마지막 밤이야.

그런 밤이야.     


그런 밤이 될 수 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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