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함: 지내는 사이가 매우 친하고 가깝다.
꼼을 인터뷰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제일 마지막 질문으로 이것을 묻겠다.
나야? 고구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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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물어보는 게 나으려나.
내 인생에 개는 꼼이 처음이라 꼼을 통해 개를 배웠다.
개가 먹으면 안 되는 음식부터 목욕 주기, 조심해야 할 꽃, 증상별 대처 방법까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디 가서 개를 모른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만큼 숙달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개를 아는 건 또 아니다.
내가 아는 건 꼼이다.
근데 마침 꼼이 개여서, 개를 모르지는 않게 되었다고나 할까.
꼼과 지내면서 뼈저리게 알게 된 개의 특성은 저마다의 개가 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산책코스부터 사료 기호성, 편안해하는 하네스, 질병별 증상 정도까지.
같이 생을 나누는 가족이 신경 쓰지 않으면 알아내기 힘든 것들이다.
저마다의 개가 전부 사랑스럽기는 마찬가지여도 똑같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개가 염화칼슘을 밟으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내 옆을 지나가는 저 개가 어떤 식이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만지면 좋아하는 부위가 어디인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행동은 무엇인지도.
만성 췌장염을 앓고 있는 내 개가 간식을 먹는 데 제약이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 리 없듯이 말이다.
따라서 개에게는 가족이 있어야 한다.
선의로 눈앞에 내밀어진 간식을 대신해서 정중히 거절해 줄 이로운 훼방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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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정의로는 가까이에 있으면서 족쇄가 되지 않는 사이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피를 나눈다는 건 너무 거창하니까 베개를 나눠 벤다가 좋겠다.
나란히 누워 베개를 나눠 베도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사이.
그런 의미에서 꼼과 나는 완전한 가족이다.
우리는 한 침대를 나누어 쓰면서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의식 활동이 쉬고 있는 상태에서도 서로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신뢰를 주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를 혼자 두지는 않겠구나.
한밤중에 일어난 꼼이 토를 하면 나는 흔적을 치우고 입을 닦아주고 등을 어루만져준다.
한밤중에 일어난 내가 휴대전화를 만지면 꼼은 머리맡으로 다가와 마주 보며 눕는다.
자다 깬 까만 눈동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잠들기에는 꼼의 눈빛이 휴대전화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보다 더욱 안성맞춤이라는 건 안다.
화면 속보다는 꼼의 눈 속이 훨씬 흥미로우니까,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감기는 눈꺼풀에 맞서는, 지는 게 결국 이기는 게 되는 달밤의 눈싸움이 실눈 너머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결과는 언제나 눈꺼풀의 승.
사이좋게 지고 만 우리에게 기분 좋은 아침이 남았다.
잘 잤어?
그리고 하루 끝엔 베개가 기다리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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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쯤에서 꼼의 신뢰를 단박에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비법을 슬쩍 공개해 보고자 한다.
신뢰만큼 친밀해질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전에, [꼼의 신뢰 단계]는 다음과 같다.
1단계: 신뢰 0% 무작정 만지려 드는 사람. 작은 쓰다듬도 허락해주지 않는다.
2단계: 신뢰 30% 조심스럽게 근처에 앉는 사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3단계: 신뢰 50% 전에 만난 적 있는 사람. 꼬리를 흔들며 세차게 반긴다.
4단계: 신뢰 80% 집에 찾아온 사람.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막역한 사이가 된다.
5단계: 신뢰 100% 매일 밤 같이 잠드는 사람. 무엇이든 가능하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비장의 카드는 <집>이다.
나와 친해져 집에 초대되기만 하면 꼼의 신뢰는 저절로 획득할 수 있다.
아무래도 꼼이 가장 편안하게 생각하는 공간인 ‘집’이 제공하는 친밀함이 꼼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집안 곳곳이 꼼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걸 방패 삼아 자신감이 안 생길 리 없기도 하고.
집안에서만큼은 남부러울 것 없이 위풍당당한 꼼을 만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단 몇 개월 만에 실질적인 집주인 자리를 꿰찬 꼼씨는 초인종이 울리면 제일 먼저 달려 나가 손님을 맞이하곤 한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라는 사막여우처럼 하루 종일 당신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격한 반응이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건지.
한바탕 소란스러운 환대가 끝나고 나면 손님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뜻한 차를 내오는 대신 장난감을 가지고 나온다.
선물하겠다는 건 아니고, 잡으라는 의미다.
가지고 놀아야 하니까 손님은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하시게.
얼렁뚱땅 2차 파티가 시작되었다.
주인공은 꼼이고, 손님은 파트너가 되어서 단 하나뿐인 관객인 내 앞에서 <잡아라, 당겨라, 던져라> 합동 공연을 펼친다.
관객 참여 공연인 탓에 나 역시나 어느새 무대 위로 올라 가 주인공의 구령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한창 정신없이 놀다 보면 장난감들로 어질러진 거실 한복판에 꼼이 차렷자세를 하고 앉아 있는 기이한 현상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손님 - 꼼은 갑자기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나 - 이제 밥달래..
꼼 - 워웡!
어디 내놓기 부끄럽지만 꼼이 준비한 손님 환대식은 나름의 식순도 갖추고 있다.
입장을 안내하고 공연을 펼치고 나면 간식 수여식을 마지막으로 행사는 끝이 난다.
손님을 향한 관심도 그걸로 끝.
정말 이런 실리주의자가 없다.
민망함에 버둥대는 건 왜 관객 몫인 걸까.
꼼이 펼치는 쇼를 매일 직관할 수 있는 VIP 관객이 되어버린 관계로 멤버십 비용을 충당하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다.
매번 말릴 새도 없이 시작되는 공연에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얼마 안 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보상을 바라는 꼼에 모르쇠로 발뺌할 수도 없고 난처하다.
언젠가는 보상 준비가 덜 된 탓에 공연이 끝난 후에도 공연료를 지급하지 못해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데
오도 가도 못하게 막아설 때는 언제고 부엌에서 풍겨오는 고구마 냄새에 나를 내팽개치고는 달려가던 꼼의 뒷모습을 아직 잊지 못한다.
내가 너 주려고 삶고 있는 거잖아. 나를 버리고 가면 어떡해.
그건 마치 전생에 두고 온 옛 연인이 이제 막 현생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자의 긴박함이었다.
그럼 나는 졸지에 버려진 현 연인인 건가.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꼼에게 고구마를 까줘야 하는 존재인 것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현 고구마 까개.
고구마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VIP 관객에서 고구마 까개가 되어버렸다.
김이 펄펄 나는 고구마를 까주느라 손가락도 데면서 열심히 바치고 있는데 꼼은 내 옆에 바싹 다가앉아 악덕 고용주처럼 일 초에 한 번씩 내놓으라며 재촉을 한다.
지금까지 받아먹은 고구마가 몇인데 자기는 보지도 먹지도 못했단다.
이번에 펼치는 쇼는 마술쇼인가 보다.
까놓으면 사라지고 까놓으면 사라지고, 누구도 먹은 이 없는데 배부른 개가 기분 좋게 웃고 있다.
지금은 꼼이 3.3kg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때 4.5kg까지 찐 적이 있었다.
중성화수술의 영향이라고 둘러대기에는 2년간 꾸준하게 차오른 살이어서 머쓱하다.
한 살을 전후로 개의 성장이 끝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계속 자라나길래 그런가 보다 했었는데 그게 온통 살일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눌러본 사진첩에서 꼼이 아닌 웬 삼각형이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삼각형이었다.
이등변 삼각형도 아닌 정삼각형이 떡하니 꼼의 몸에 들어가 있었다.
분명 눈코입만 보면 내 개가 맞는데 사진 속에 있는 개는 어디서 나타난 거지?
실물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믿고 싶지 않았지만 꼼의 다리 건강을 위해서라도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래. 오늘부터 다이어트 돌입이다!
제일 먼저 할 일로, 꼼이 하루 중 가장 많이 먹는 사료부터 바꾸기로 했다.
기존에 먹이던 일반 사료에서 다이어트 사료로 조금씩 바꿔나가다가 3개월 후에는 100% 다이어트 사료로만 먹였다.
간식은 당연히 금지.
당시엔 췌장염 진단을 받기 전이라 온갖 간식을 종류별로 먹였을 땐데 큰맘 먹고 과감하게 하나도 남김없이 끊어버렸다.
그럼 마지막으로 이것이 남는다.
다이어트의 최대 적수이지만 꼼이 살아가는 낙이자 희망인, 이름도 찬란하여라 고. 구.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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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2020년으로 가보자.
꼼이 4.5kg을 찍은 역사적인 날에 우리는 동물병원에 앉아 있었다.
4월이 접종 달이니깐 9월이면 병원을 찾을 시기도 아닌데 꼼은 왜 그날 병원으로 가 최고 몸무게를 기록으로 남겨두었을까.
다이어트를 하라는 계시였던 걸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 무슨 이유로 병원에 갔던 건지는 기억나질 않지만, 수첩에 적혀 있지 않는 걸로 보아 큰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내 머릿속에 9월의 하루가 콕 박혀있는 이유는 병원에서 만난 어떤 모르는 개 때문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꼼과 나란히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더러러러러덜 더러러러러러덜 떨고 있는 꼼을 진정시키다 지쳐 잠시 옆에 내려놨는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앞서 언급한 어떤 모르는 개가 훌쩍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앉았다.
오.
순식간에 나를 차지한 걸 보면 내가 꼼을 달래는 솜씨가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당황해하는 보호자와 천연덕스러운 개 사이에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바빴지만 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었다.
아싸. 이게 웬 굴러온 개야.
왼손으로는 모르는 개를, 오른손으로는 꼼을 쓰다듬으면서 잠시나마 권력을 맛보았다.
나의 천하는 모르는 개의 이름이 호명되면서 금방 흐지부지되어버렸지만 그날 처음 알게 된 권력의 달콤함은 내 DNA 어딘가에 남아있을지 모른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슬거리던 갈색 털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으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내가 이날을 언급하는 이유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작은 천사의 강림 때문만이 아니다.
겉으로 보았을 땐 작은 천사와 나의 개가 그리 크게 차이 나 보이지 않았는데 천사가 떠나고 빈 무릎 위로 올라온 나의 개가 비교도 안 될 만큼 묵직해서 더는 미룰 수 없는 엄청난 결심을 내린 날이기 때문이다.
꼼아, 고구마도 이제 안녕이야.
2020년의 9월은 꼼이 고구마를 떠나보낸 달이다.
처음으로 그해 겨울, 꼼은 고구마가 떠나간 퍽퍽한 겨울을 났다.
눈물을 가득 머금고 식이조절과 운동을 병행한 끝에 나의 천사 꼼은 2년 6개월 만에 1.2kg을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꼼은! 더는! 삼각형이! 아니다!
삼각형은 무슨, 심지어 가장 이상적인 개의 몸인 ‘갈비뼈가 약간 보여 만져보면 쉽게 촉진되는 상태’를 유지 중이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삼각형의 꼼과 지금의 꼼이 같은 개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다.
몸무게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다행히 꼼의 슬개골도 제자리를 되찾았다.
진행이 계속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었는데 지금은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검사해도 이대로 유지하면 된다고 한다.
하마터면 나의 무심함으로 꼼을 수술대 위에 오르게 할 뻔했다.
그때 차린 정신머리로 엄격하진 나를 보고 주위에서는 지독하다며 한소리씩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꼼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내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대마왕이라도 기꺼이 되겠다.
나는 꼼 전용 간식 비켜 대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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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뭐든 좋아 모드인 나지만, 꼼의 건강과 직결된 문제라면 나도 모르게 단호해지는 것 같다.
꼼이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어서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판단을 바로 하게 된다.
꼼은 내가 어디로 가든지 따라나서고, 내가 주는 거라면 냄새도 안 맡고 받아먹어서 더 그렇다.
언제든지 벌떡, 무엇이든지 꿀꺽.
꼿꼿하게 앉아 있다가도 내가 손만 대면 흐물거리는 꼼을 보고 있으면 정신을 안 차릴 수가 없다.
낯선 사람이 다가와 안으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내게로 달려와 품에 안기는 꼼을 두고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있는 힘껏 보호막이 되어 주어야지.
꼼은 다른 개가 무서워도 내가 있으면 꾹 참고 옆에 앉아 있는다.
꼼의 용기는 내가 자신을 보호해 줄 거라는 걸 알고 있음에서 비롯된다.
다른 개가 꼼에게 관심을 두지 않도록 요령껏 신경을 돌려낼 걸 알아서 꼼은 마음 편히 나의 곁에서 쉬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꼼이 나를 믿어주는 덕에 다른 개들을 마음껏 예뻐해 줄 수 있다.
경계하거나 질투하는 법 없이 차분하게 앉아 내게 상황을 맡겨주어서 고맙다.
엉덩이를 맞대고 내게 꼭 붙어있다가 이제 집에 가려는 나의 작은 몸짓을 알아채고 몸을 벌떡 일으키는 꼼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사랑을 감추어내기가 쉽지 않다.
누가 뭐래도 나는 꼼 사랑 대마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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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친구들의 인사가 잦았던 날이었다.
꼼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괜찮았어? 물었더니 꼼이 머리를 폭- 내 어깨에 기대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딘가 모르게 속상해 보이는 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앞으로는 되도록이면 친구들이 많은 곳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몰래 속으로 긴장했을 꼼에게 오늘은 고구마를 삶아줘야겠다고.
시무룩한 개의 기분을 돌려놓는 데엔 고구마만 한 게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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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아, 집에 가서 고구마 줄게.
꼼의 꼬리가 기분 좋게 살랑거린다.
대신 조금만 먹어야 해. 많이 먹으면 다시 다이어트해야 하니까.
모처럼 기분을 내보려 했더니 고구마가 영 도와주지를 않는다.
아니, 개가 고구마를 이렇게나 좋아하면 주식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니면 적어도 살이 찌지는 말아야지.
괜히 심술이 나는 밤이다.
밤이 되니 밤고구마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