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클럽 브랜드 아이덴티티
어느 날 특별한 연락이 왔다. "천년동안도 로고 작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 순간 대학생 시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음악에 진심이던 나는 또래 친구와 함께 처음 그 문턱을 넘었고, 류복성 밴드의 라이브를 처음 접했던 기억이 있다. 여유돈이 없던 대학생 새내기 시절이라 칵테일 한 잔씩 시키고 숨죽이며 들었던 재즈의 울림. 한국의 블루노트라 불리는 천년동안도, 그 전설적인 공간의 로고디자인을 맡게 된다니. 음악을 사랑하는 나에게 이보다 반가운 의뢰가 또 있을까.
천년동안도는 1987년 대학로에서 시작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국내외 재즈 뮤지션들이 거쳐간 성지 같은 무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월이 쌓아올린 명성과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이 공연하는 강점에 비해, 브랜딩에 대한 이해도는 아쉬웠다. 간판을 위해 단순히 한글로 천년동안도라고 적힌 로고를 보며 "이건 제대로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이 가진 진짜 가치를 시각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천년동안도’라는 이름은 한글로만 완성되어야 했다. 해외 유수의 전통이 있는 클럽들의 로고와 타입을 모조리 찾아 보았다. 뉴욕 블루노트처럼 시간이 지나도 클래식함을 잃지 않으면서, 레트로도 현대적도 아닌 독자적인 길을 찾아야 했다. 레트로도의 방향도 아니였고 그리 현대적이기도 아닌, 오직 천년동안도만의 독자적인 방향을 찾아야 했다. 일단 에너지가 필요하다. 나는 블루스의 기를 받기 위해 웅산의 the blues앨범을 틀었다.
해답은 뜻밖의 곳에서 왔다. 비석에 새겨진 상형문자. 직접적인 말보다 추상적인 상형문자의 특징. 즉흥성과 열린 해석, 재즈의 음악적 특성과 묘하게 닮아 있지 않은가? "바로 이거다!" 그 순간 천년동안도만의 언어가 보였다.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으면서, 음악이 피어오르는 공간의 품격을 담을 수 있는 방향이었다.
로고타입 작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건 시간이 지나도 변치않는 가치였다. 10년, 혹은 20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을 것, 그러면서 재즈클럽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낼 것. 나는 각 글자의 획과 여백이 마치 드럼의 박자처럼, 로고 전체가 하나의 리듬처럼 흐르길 바랐다. 유치하지 않으면서도 무게감을 가지고, 단독으로도 충분한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도록 완성도에 집중했다.
몇 년 후, '놀면 뭐하니?' 프로그램의 유플레쉬에서 유재석님이 드러머로 변신해 한상원님과 잼 세션을 하는 모습을 봤다. 그 무대 뒤에 익숙한 로고가 보였다. 바로 천년동안도의 로고였다. 너무나 반가운 얼굴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천년동안도는 천년이 지나도 그 자리에서 음악을 품고 있을 공간이라는 것을.브랜딩이란 결국 시간을 견뎌내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것이 아닐까.대학생 새내기 시절 천년동안도에서 들었던 그 순간의 음들이 아직도 내 안에서 살아 있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