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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Jul 06. 2022

마녀, 주술을 부린걸까

서 그렇게 미워한 사람은 없었다. 그저 나랑 안 맞는 정도. 질투하는 정도. 부러운 정도. 얄미운 정도. 짜증 나는 정도. 안 보면 해결되는 그저 그런 정도. 미워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마음에 비례해서 싹트는 경우가 많으므로. 좋아하던 사람이 완전히 싫어지고 미워지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학창 시절에 그저 질투의 감정을 느끼게 했던 아이였다. 친한 적도 없었는데... 질투의 원인은 오히려 나의 단짝 친구에게 있었다. 나는 말수가 극도로 아주 많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처음 단짝이 된 내 친구는 나의 대척점에 놓여있는 사람이었다.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고 말의 속도도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거의 숨을 쉬지 않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냥 같은 반이었다면 단짝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첫 짝꿍이 되었고 게다가 2년 연속 같은 반이 되는 행운까지 겹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학생 때의 일이었다.


얼굴이 참 말간 아이였다. 잡티 없이 투명한 피부. 하얀 얼굴에는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파였었다. 항상 잘 웃는 아이였다. 웃음도 많았고 농담도 잘하고 이야기도 잘하는 그런 밝은 아이였다. 그 아이와는 한 번도 짝이 된 적이 없었으므로 나처럼 소극적인 아이는 그런 아이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단짝인 내 친구가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여러 번 겹친 행운의 결과였다. 단짝인 내 친구가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면서부터 내 질투의 감정은 싹이 텄던 것 같다. 내게는 전부였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깔깔 거리는 모습을 보자 그 아이를 어느 순간부터 미워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MBTI 검사에서 E의 소유자였다면 같이 어울리면 그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짝 친구가 한 명쯤 더 생기면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 처음 MBTI 검사를 하고 I 성향이 100%가 나왔을 때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은 내 주변의 모든 지인들이 내가 말수가 없고 늘 자리만 지키던 아이였다는 사실을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분명 나는 변했고 누구보다도 말을 많이 하는 성향의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각고의 노력이었던 것 같은데 지나고 나니 말을 안 하고 어떻게 그런 오랜 세월을 살았나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노릇이었다. MBTI 검사를 할수록 E성향은 늘어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MBTI 검사의 정확도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우세종은 I 이므로 나는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글쓰기도 혼자 있는 것과 어울리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제는 가끔 여자 사람 친구를 만나 실컷 수다를 떨어야 사는 맛이 난다. 언제 그런 적이 있었나 싶게 나는 변했고 나의 단짝 친구도 변했다. 다만, 그 아이는 앳된 소녀의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서 변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항상 웃던 맑고 하얀 얼굴로.


그 아이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훨씬 지난 어느 날이었다. 단짝 친구로부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아이의 출석번호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나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었던 것이었다. 친한 적도 없던 아이를 나는 왜 머릿속에 각인처럼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내가 갖고 있지 않 그 아이의 명랑함이 탐이 나서 질투의 감정을 키웠었고 그로 인해 그 아이는 질투했던 아이로 내 머릿속을 표류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E 성향의 사람이었다면 그 아이는 나의 친구가 되어 있었을까? 그러면, 나는 그 아이의 장례식에서 오열하고 있었을까? 단지 조금 미워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관여하게 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내가 마녀가 되어 주술이라도 건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왜 그 아이의 표본을 만들고 자라지 않는 시간을 뚜껑처럼 덮어 아무도 닿지 않는 깊은 어두움 속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일까?


상실. 좋아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에도 나는 나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는지 확인하곤 했다. 반대의 감정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저 같은 반이었다는 인연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이미 치러지고 소식만 전해진 장례식에서 나의 잘못을 찾으며 허둥대는 사람으로 서 있었다. 잘못이라면 마음으로 미워했던 한 때였고 그 마음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중학교 교실로 들어가 그 아이를 안고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질투해서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분명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는 감정들이었다. 미워한다고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오히려 미워할수록 미워하는 감정을 먹고 오래도록 살아가는 사람은 많이 봐 왔다. 나는 마음으로 질투했을 뿐, 그 아이에게 어떤 피해를 입힌 적도 없었다. 그럴 깜냥도 되지 않는 아이였으니까. 그러니, 내게는 잘못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 아이의 맑은 웃음과 보조개를 기억한다. 출석번호를 기억한다. 정확한 이름을 기억한다. 그 아이는 죽고 없는데... 나는 그 아이를 너무나 많이 기억한다. 소식으로 전해 들은 얘기로 그 아이의 죽는 순간을 이미지처럼 떠올린다. 어울리지 않는다. 그 아이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서 웃고만 있는데... 그 아이는 죽어서는 안 되는 아이였는데... 학창 시절에 닮고 싶었던 롤모델 같은 아이로 그 아이는 살아가고 있어야 마땅했는데...


아이는 없고. 나는 아이를 죽는 순간까지 기억할 것 같다. 너는 죽기에는 너무 맑고 예뻤던 아이였다고. 죽음의 그림자 한 조각도 지니지 않았던 완벽하게 쾌활한 아이였다고. 나는 그 아이를 애도하고 애도한다. 인과관계없는 잘못으로 인하여. 마녀가 잘못된 주술을 바로잡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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