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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방향

순간의 말들(4)

by 하민

단순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운동과

커피 한 잔,

필사와

스터디,

시 쓰기와

퇴고,

그리고 좋은 드라마 다시 보기


이것은 나만을 위해 사용된 시간의 열거

(그 외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열거할 수가 없다)


누구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나를 견디지 못하던 때


그때에도 시간은 빨리 흘렀다


자성 혼란에 빠진 나침반처럼

방향을 몰라 같은 자리에 무수한 구둣발을 찍었던 순간


오래 다져진 덕분이었겠지만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므로),


그 순간도 사랑하기로 했다

젖어 있거나 말라 있거나 지나간 페이지는 모두 소중하고

단지 찢어지는 게 두려울 뿐이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나니 알차게 잠이 든다


열심히 사는 내가 기쁘다는 것과

결과 없는 과정도 재미있다는 것을 안다

(두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살았다)


제대로 된 방향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단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 좋아서 그곳으로 향한다


문득, 환기를 하려고 연 창문에서

바람이 훅 들어올 때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방금 세수한 허브 식물들이 가득 담긴

커다란 화분을 마주한 것 같은


아, 그런 날은 바람의 꼬리라도 붙들고 날아 보고 싶다


종종 뛰어내리는 (설레는) 상상을 한다

날개라도 돋기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시라는 세계는 상상의 세계다

새로운 걸 창조하는 세계는 참 고혹적이다


그 창문은 항상 눈앞에 있다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마침 노크 소리에 창문 앞에 선다


창문을 여는 일은 매번 떨리는 순간이지만,

바람의 방향은 창문이 열리는 곳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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