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잡이 때 실뭉치를 잡았다. 그 실을 푼 나는 인생이라는 끝을 모르는 길고 긴 길을 걷는 중이다.
영화를 볼 때 스포일러를 미리 보는 편이다. 결말을 미리 알아야 마음이 편안하다. 이 길의 끝도 그렇게 궁금했나 보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선택을 난 무의식 중에 해버렸다.
.
걷는다.
주변 사람들의 걷는 폼을 관찰한다. 팔은 자연스레 흔들고, 손은 쫙 펴지 않는다. 유리창에 비친 나는 사람들을 따라 한다.
약한 왼발에서만 타박타박 소리가 나는 부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자연스럽게 다니려고 한다.
긴장한 티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
.
가끔 사고 당시가 스치듯 떠오른다. 떨어지며 잠에서 깬다.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준비하던 때부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 어떤 순간순간들이 날 괴롭힌다. 그때 유행한 로제의 노래 '아파트'를 들으면 불안감이 몰려온다. 혼자 무엇도 먹을 수 없던 때가 떠오르면 식사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 그렇게 어떤 공기, 색감, 표정, 목소리에 나는 잠깐 두려움을 느낀다.
.
걷는다.
아직 뛰지는 못한다. 이전에는 뛰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횡단보도 파란불이 깜박일 때, 눈앞에 내가 탈 버스가 도착했을 때에는 조금 뛰고 싶다. 급한 마음이 아니라, 다른 시간의 여유를 위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
불안하고 우울한 무언가가 나를 사로 잡지만 버텨야지. 난 버티고 있어. 오늘도 운동을 했고 과외도 갔고 공부도 했어. 하루가 끝났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작가의 책도 읽을 거야. 나는 이렇게 살았고 큰 변수가 없는 한 이렇게 살 거야. - 작년 3월 일기에.
작년 이맘때의 나는 어땠나. 초여름부터 나는 잠과의 사투를 벌였다. 허투루 보내지는 시간이 아까워 아침엔 헬스장을, 오후엔 공부를, 저녁 10시까지는 과외를 하며 빈틈을 없게 했다. 바쁘면 힘든 것도 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여유 있는 일상 속 내 마음만 여유가 없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다. 버스를 타고 경치를 구경하다 문득 창문으로 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보고 놀랐다. 가장 예쁜 날 죽음을 떠올리며 무슨 감정이지 고민했다. 나는 나를 아끼지 못했다. 그 몇 달간 수도 없이 방황했다.
어느 날은 잠만 잤다. 꿈을 꿨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나에게 질문을 했다. 안부를 물었다. 괜찮다고 했다. 내가 같은 인사를 건넸다. 힘들다고 했다.
그 모든 인물이 결국 나였다. 내가 내게 묻고 답을 하고.
.
걷는다.
제자리를 걷는다. 그저 둘러본다.
운동을 해도 그렇고, 나는 제자리 돌기를 좋아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으면 멈췄다.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심지어는 사람을 만나서도 궁금한 부분은 어떻게든 알아야 다음장으로 넘어갔다. 그 습관 덕에 지금 와서야 인간관계도 더 나아갈지 말지를 선택한다. 어떤 친구는 몇 년 만에 만나 이후를 기약했고, 어떤 이에겐 확실한 끝을 말했다.
.
가까웠던 어떤 사람에게 또 자살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남들은 나를 그렇게 보나. 내가 아무리 힘들었음을 피력해도,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해석은 그들 몫인가 보다. 가끔은 내 이야기가 와전되어 들릴 때도 있었다. 내 행동과 말에 대해 굳이 다 설명할 이유가 없구나 느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 시간에 차라리 따뜻함을 전해야겠다 싶었다.
.
걷는다.
며칠 전에는 넘어질 뻔했다. 용케 중심을 잡았다. 퇴원한 이후로 집에서 참 많이 넘어졌다. 누군가 나를 봤다면 슬랩스틱을 하나 싶었을 것이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냥' 일어났다. 골절과 마비로 못 걸은 때도, 수술로 쉴 새 없이 진통제를 흡수시킬 때도 있었다. 넘어지는 것은 이제 내겐 사소한 일이다. 너무나 많은 좌절과 고통을 느꼈기에, 이제 내게 어떤 일도 좌절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사소하다. 그 무엇도 해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넘어져도 되니까.
.
걷고 있다. 멈추지 않았다.
사고 이전에 내가 느낀 우울감은 물을 가득 머금은 솜이 된 느낌과 같았다. 내가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아는데, 그저 물에 젖은 것뿐인데 푹 잠겨있는 듯했다. 울지도 않았다. 물속에선 울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나. 나는 그냥 그렇게 우울 속에 웅크려있었다.
지금은 느리지만 걷고 있다. 나를 위해 멈추지 않는다. 부족해도 나아가고 있다.
.
내가 돌아보는 것은 걸어온 길이다. 사고는 많은 것을 뒤바꿨다. 이제야 나를 더 아끼고 사랑하는 만큼, 이전의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느낀다. 그런 나를 내 자신이 쓰다듬는다. 가끔은 동굴에 들어간다. 정신없는 나를 진정시킨다.
내가 이전과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무작정 걷지는 않을 것이다. 힘들 땐 함께 걸어달라고 부탁도 해보고, 지칠 땐 여유를 가지면서 나를 돌볼 것이다. 몸은 약해졌지만 마음은 강해졌음을 느낀다. 드디어 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간들을 모아 나는 더 큰 사람이 될 것이다.
.
내 꿈은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 덕분에 웃을 일이 많기를 바랐다. 지금에서야 그 꿈에는 내 행복도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싶다. 또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
.
그렇게 나는 오늘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