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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피 Oct 03. 2021

"사랑의 벽"을 지나 "몽마르뜨"로

 계획 따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파리에서의 24시간 ②

(위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출장에서 돌아올 때면 조금이라도 백팩의 무게를 줄이고자 노트북 어댑터는 캐리어에 넣기 때문에 내 노트북의 배터리는 2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한정된 시간 동안 급하게 잡은 다음날 일정이 예전에 가보지 못했던 몽마르뜨 언덕오르세 미술관이었다. 노트북으로 동선과 주변 정보를 찾아보던 중 가보고 싶은 곳이 추가되었다. 몽마르뜨 언덕 주변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로 “사랑해”라는 말들이 써 있는 “사랑의 벽”이었다. 보통 몽마르뜨 언덕을 가기 위해 내리는 지하철 역과 한정거장 차이였기에 간다기보다는 들린다는 기분이었다.


("사랑의 벽" 일부)


“사랑의 벽”은 지하철역 Abbesses 역에서 나오자마자 있는 작은 공원 한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서둘러 조식을 먹고 체크아웃을 하고 나온 데다가 초행길이었던지라 다소 긴장을 했었는데 Abbesses 역 앞 공원에서 한적함을 느끼니 긴장이 풀리고 여유가 생겼다. 당일치기 일정이 아니었다면, 그곳이 첫 행선지가 아니었다면 벤치에 앉아서 멍 때리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사랑의 벽”은 짙은 남색 타일들 위에 수백 개의 언어로 “사랑해”라고 쓰여진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40평방미터의 벽이었다.


그리 관광지로 유명한 장소가 아니었는지 주변에 관광객은 나 혼자였다. 왠지 숨겨진 장소를 찾아낸 기분으로 한글을 포함해서 내가 아는 언어로 쓰인 문구들을 찾아보며 그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봤을 때보다 더 오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관광 명소는 ‘찍고 온다’라는 느낌이라면 “사랑의 벽”은 왠지 천천히 즐기고 싶은 나만의 장소 같은 느낌이었다.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옮겨서 몽마르뜨 언덕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기에 표지판을 보며 슬슬 걸어갔다. 목적지는 크게 두 군데, 예술가들이 모여있다는 테르트르 광장사크레 쾨르 대성당이었다. “사랑의 벽”에서 출발하여 한적한 거리를 걷다 보니 몽마르뜨 언덕에 가까워졌는지 슬슬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심 먹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지만 너무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괜찮아 보이는 모퉁이의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주문을 했다.


나       : 어니언 수프 주세요.
웨이터 : 다른 건요?
나       : 괜찮아요. 아, 맥주 한잔도요.

웨이터는 달랑 수프 하나 시킨 나를 살짝 의아하게 쳐다보고는 곧 무심히 돌아섰다. 먹을 줄 모르는 무식한 동양인이라고 생각했으려나. 뭐 상관없지만.


사실 ‘어니언 수프’가 꼭 먹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국물이 마시고 싶었다. 약 일주일의 그리스 출장 동안 국물을 한 방울도 못 마셨기 때문이다. 출장지에서 나름 현지식으로 먹었는데 정말 수프고 뭐고 국물 있는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내가 현지 직원에게 너네 음식에는 왜 수프나 스튜 같은 게 없냐고 물어보니 그런 건 춥고 먹을 거 없는 데서나 먹는 거라고 하더라. (특정 국가를 대변하지 않는 개인의 의견입니다.) 생각해보면 국물이라는 게 재료에 물을 붓고 우려내는 거긴 하다만.. 나름 외국에서도 한식 없이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한식을 안 먹는 거랑 국물을 안 마시는 거랑은 또 다르더라. 이 출장의 교훈 “난 한식은 안 먹어도 국물은 섭취해줘야 한다.”에 따라 이후 출장을 갈 때는 꼭 컵라면 한두 개는 챙겨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난, 아니 내 몸은 국물을 간절히 원하는 상태였고 호텔의 석식과 조식에서도 국물이 나오지 않아서 점심에는 무조건 국물을 먹겠다고 다짐을 하였고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고른 메뉴가 어니언 수프였다. 사실 어니언 수프가 그리 국물이 많은 음식은 아니었지만 싹싹 긁어먹고는 ‘수프를 하나 더 달라고 하면 웨이터가 날 어떻게 쳐다볼까’에 대해서 잠시 동안 고민을 하다가 -맥주로 배도 부르겠다- 레스토랑을 나와 테르트르 광장을 향했다.


한 가지 밝힐 것이 있는데 나의 여행 스타일은 일행이 있을 때와 혼자 다닐 때 차이가 꽤 크다. 일행이 있을 때는 보다 계획적이다. 언제 도착하고 얼마나 보고 이후에 어디서 뭘 먹을지 등등 일정을 짜고 이에 맞추어 다닌다. 근데 혼자가 되면 대략적인 방문지나 근처의 맛집 정도만 정해놓고 그냥 정처 없이 걷게 된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히려 혼자가 되면 남의 눈치 안 보고 유유자적하게 걷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날은 날씨가 정말 좋았다. 하늘에는 흰구름과 파란 하늘의 비율이 2:8 정도로 맑았으며 습하지 않은 선선한 바람이 간간히 불었으며 골목길에서 본 온도계가 보여준 그날의 기온은 섭씨 24도였다. 정말 여행 다니기에, 정처 없이 걸어 다니기에 최고의 날씨였다. 이날 날씨에 대한 인상이 얼마나 깊었는지 지금도 나에게 있어서 여행 다니기 좋은 날씨의 기준은 “맑은데 선선한 바람이 부는 24도”의 날씨다.


이런 날씨가 근자감을 불어넣어 줬던 것이었을까? 그날의 나는 그냥 걷다 보면 테르트르 광장에 도착할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지도에서 대충 위치를 확인했고 날도 좋으니 그냥 걷다 보면 광장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겠거니 하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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