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트르 광장을 찾아 골목을 한참 걸어도 예술가는커녕 이젤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맑은데 선선한 바람이 부는 24도”의 마법으로 아무런 걱정 없이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오히려 인적이 점차 드물어지고 옆에는 건물이 아니라 포도밭이 펼쳐졌다. 아직 포도가 여물기에는 이른 시기였지만 그렇기에 푸릇함이 인상적이었다. 마침 근처에 노천카페가 있길래 거기 앉아서 맥주 한잔을 마셨다. 뒤늦게 시원한 화이트 와인의 매력을 알게 된 지금이었다면 시원하게 칠링 되어 있는 화이트 와인을 시켰을 텐데.
인적이 드문 한적한 포도밭 옆 노천카페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있으려니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그저 그 순간만을 즐기게 되었다. 분명 난 테르트르 광장을 찾아 가고 있었는데 꼭 거길 가야 하나 싶은 생각과 함께-내가 엉뚱한 데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혹시 주말이라서 예술가들이 다 쉬는 게 아닐까라는 현실 부정급의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다.
시간도 꽤 지났기에 테르트르 광장은 포기하고 먼발치에서 보이는 사크레 쾨르 대성당으로 향했다. 대성당의 지붕이 점점 크게 보일 때쯤 내가 예술가들의 거리라는 테르트르 광장에 도착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난 그날이 주말 치고는 한가한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몽마르뜨 언덕의 사람들은 다 여기에 모여있었다. 여태까지 내가 걸었던 몽마르뜨 언덕은 뭐였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역시나 테르트르 광장은 나에게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찍고 오는’ 관광 명소였다. 굳이 초상화를 가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짐은 다 호텔에 두고 선글라스 하나 끼고 거의 맨손으로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기념품으로 짐을 늘리고 싶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나를 강하게 유혹하는 장소가 있었으니 테르트르 광장과 샤크레 쾨르 대성당 사이 골목에 열린 주말 장터였다. 유럽 도시들이라면 주말에 벼룩시장이 열리곤 하는데 이 장터는 그런 벼룩시장이 아니라 인근 농가에서 자기들의 음식을 가지고 나온 음식 장터였다! 음식 장터답게 여기저기에서 다양한 음식과 와인까지 시식을 해주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안 그래도 예상보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서 원래 오후 일정이었던 오르세 미술관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나의 고민은 싹 사라져 버렸다. 프랑스 현지 농가에서 음식을 가져와서 공짜로 맛보라는데 가긴 어딜 가나. 예술은 영원하다고 하니 이번에 못 봐도 나중에 가 볼 기회가 있겠지. (그리고 아직까지 오르세 미술관은 가보지 못했다.)
그리 크지 않은 장터였지만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했다. 농산물도 있긴 했지만 내 관심을 끈 것은 역시 시식할 수 있는 음식들이었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는 여러 가지 종류의 꿀들도 있었고 다양한 치즈들도 있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푸와그라였다. 아니 푸와그라면 엄청 비싸고 막 고급 레스토랑 가야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자세히 보니 그냥 푸와그라가 아니라 빵에 발라먹는 푸와그라 스프레드였지만 당시에는 이런 고급 식재료를 시식할 수 있다니! 라며 역시 프랑스인가 싶었었다.
시식을 하며 장터를 쭉 지나가니 샤크레 쾨르 대성당이 나왔다. 대성당 앞 계단 아래로는 파리 시내 전경이 펼쳐져 있었고 많은 관광객들이 계단이나 근처 언덕에 앉아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은 계단 중간에서 앰프 하나를 두고 각종 팝을 노래하는 버스킹 공연이었다. 이거다 싶어서 다시 장터에 가서 -얼굴에 철판 깔고- 와인, 치즈, 그리고 푸와그라(스프레드를 바른 식빵 조각) 시식을 다시 받아서 버스킹 하는 앞쪽 계단에 자리 잡았다.
“맑은데 선선한 바람이 부는 24도”의 날씨에 파리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계단에 앉아서 길거리 뮤지션이 부르는 비틀스의 “Hey Jude”를 다른 관광객들과 따라 부르며 장터에서 받아온 치즈를 조금씩 뜯어먹으며 와인을 홀짝거렸던 순간은 몽마르뜨 언덕에서 보낸 한나절의 클라이맥스였다. 화창하고 쾌적한 날씨, 여유 있는 분위기,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혼자만의 시간, 살짝 오른 술기운까지 지금 되돌아봐도 감히 “완벽한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대성당 앞에서 “완벽한 순간”을 즐기며 빈둥거리다가 여유를 가지고 호텔을 들러 공항에 왔다. 샤를 드 골 공항이 워낙 수하물 분실로 유명하기 때문에 어제 어디 갔냐고 따졌던 -내가 타고 온 비행기에 실려있었던- 캐리어가 비행기에 잘 실렸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봤다. (내가 이 부끄러운 질문을 했던 게 고작 하루 전 일이었다니!) 어제 분명 오늘 내가 탈 비행기에 실어주겠다고 했지만 샤를 드 골을 믿을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역시나 내 캐리어는 비행기에 실려있지 않았다. 어디 갔냐고 물어보자 뭔가를 조회해보더니 오늘 다른 비행기 편에 인천으로 먼저 갔다고 한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된 순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안 잃어버리고 미리 보내 놓은 게 어디냐 싶었다.
이렇게 예상치 못 하게 나에게 주어졌던 파리에서의 24시간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록 멘붕 속에서 당황스러운 감정으로 시작된 하루였지만 아테네에서 정시에 비행기를 탔다면 몽마르뜨 언덕에서의 “완벽한 순간”은 내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 처음으로 비행기 놓친 경험, 이른 아침의 한적한 공원, 있는 줄도 몰랐던 몽마르뜨 언덕 포도밭, 시식용 와인을 홀짝거리며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며 부른 “Hey Jude”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던 이 24시간 속에서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