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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피 Oct 01. 2021

너 그 비행기 못 타

계획 따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파리에서의 24시간 ①

패닉 : (크게 우려하여) 허둥지둥함, 공황 상태


출장을 마치고 그리스 아테네에서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 심정이 딱 저랬다. 몇 차례 유럽 출장을 다니면서 생긴 나름의 환승 시간 기준이 2시간 정도였다. 파리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 출발시간이 9시 반 정도였으니 7시에 도착하는 나의 일정은 문제가 없었다. 아니 없었어야 했다. 아테네에서 비행기가 정시에 출발만 했다면.


아테네에서 이미 2시간 가까이 딜레이 된 비행기를 타고 오는 약 3시간 동안 좁은 이코노미석에서 -그 비행기에서 비즈니스석이라고 자리가 더 넓은 것은 아니었지만- 초조함 속에서 당시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사를 드 골 공항에 비행기가 랜딩 하였을 때 인천행 출발 시간까지 약 40분 정도 남은 것을 확인한 나는 안전벨트 등에 불이 꺼지기도 전에 일어나서 백팩을 메고 복도로 뛰어나갔다.


이런 나를 보고 내게 와서 지금 일어나시면 안 된다고 하는 승무원에게 나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늦었다고 매우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고 승무원도 딱히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독일 항공사인 루프트한자였으면 아마 어쩌라고 하면서 자리로 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터미널 간 거리가 멀어 이동하는데 시간도 꽤 걸리는 샤를 드 골에서 40분은 사실 비행기를 갈아타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그래도 절실한 마음에 비행기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나간 내 앞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내 이름이 써져 있는 팻말을 든 공항 직원이 있었다.


“저예요! 이거 제 이름이에요!”


반가움과 기대감에 당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나라고 알려주자 그 직원은 게이트 바로 앞 데스크로 가라고 하였다. 그래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가끔 공항 내에 작은 카트 같은 걸로 손님 태워주던데 그런 걸로 나 태워주는 걸까. 등등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을 떠올리며 도착한 데스크에서 직원은 나에게 호텔 바우처를 내밀며 너 비행기 놓쳤으니 여기서 자고 내일 같은 시간 비행기 타러 오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놓쳤다고?’


나는 새로운 경험을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니기에 이런 예상치 못 한 변수를 없애기 위해 보수적으로 계획을 잡는 편이다. 따라서 비행기를 놓친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시금 패닉에 빠진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까운 질문들을 무고한 직원에게 쏟아냈다.


나    : 아냐. 아직 비행기는 떠나지 않았잖아. 40분이 남았다고
직원 : 늦었어. 너 그 비행기 못 타.

☞ 터미널 이동하는 데만 30분은 넘게 걸리는 데다가 당시의 나는 생각도 못 했지만 출국심사도 했어야 했다.


나    : 아니, 그러면 내가 아테네에서 부친 내 캐리어는 어디 있는 거야?
직원 :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다가 내 등 뒤를 가리키며) 니가 타고 온 저 비행기 안에 있겠지. 내일 탈 비행기에 실어줄게”

☞  아.. 그렇지. 거기 있겠지.


더 이상 할 막말도 다 떨어진 나는 직원이 건네 준 공항 옆 이비스 호텔 바우처를 들고 넋이 나간 채로 샤를 드 골 공항을 걸어 나갔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회사였다. 이걸 알려야 하나? 뭐라고 하지? 이거 내 잘못은 아닌 거 맞지?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 원래 한국 도착 일정은 토요일이었고 하루 지연되어도 여하튼 주말 내로는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그래. 어차피 회사에 월요일에 출근하는 건 마찬가지니 회사 걱정은 하지 말자.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받은 호텔 바우처에는 그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 식사 쿠폰까지 들어있었기에 도착해서 딱 잠만 자는 용도의 작은 방에 짐을 풀고 일단 식당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었다. 암만 생각해도 지금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 하나도 인상적이지 않던 저녁식사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와인 한잔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레드 와인을 홀짝거리며 다음 날 일정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진정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다음 날 밤 비행기 타기 전까지 한나절이 주어진 샘이 아닌가! 어느새 나는 패닉에 빠져 허우적대던 것이 언제였냐는 듯이 관광객 모드로 전환되어 있었다.


파리는 대학생 때 와보고 처음이었다. 당시 파리에 대한 인상은 최악이었다. 길에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비 오고 길을 물어보니 쌩까는 불친절한 사람들 하며.. 때문에 사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당시에 안 갔던 곳 중에서 내가 가기로 고른 곳은 몽마르뜨 언덕오르세 미술관이었다. 처음 파리에 왔을 때 몽마르뜨 언덕은 동선이 맞지 않아 아예 갈 엄두도 내지 못했던 곳이었고 루브르 박물관으로 의무적인 문화 게이지를 채웠던 나에게 다른 미술관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체크아웃하고 오전에 몽마르뜨 언덕에 갔다가 오후에 오르세 미술관을 들렀다 오면 조금 빡빡하지만 알차게 한나절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이슨 말 따나 '처맞기 전까지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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