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그리고 첫 출근
2017년 6월 24일
첫 출근 날짜가 결정되고 정신없이 바빴다. 서울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정리해야 했고, 춘천에서 새 시작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합격 후 첫 주말, 엄마와 함께 춘천을 찾았다. 평소 자기 공간을 매우 중요시하는 내가 걱정되었던 엄마는, 춘천에서 살 집을 구하는 데 함께 해주셨다. 일본 교환학생과 삼척에서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집을 떠나 혼자 살아 본 경험이 있지만, 전부 기숙사 생활(군대는 간부숙소 생활)이었기에 실질적인 자취는 처음이었다.
이미 춘천 생활을 하고 있던 아나운서 동료의 소개로 부동산을 소개받았고, 부동산 사장님이 미리 뽑아 둔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딱 세 가지.
1. 창문이 클 것
2. 조용할 것
3. 회사에서 가까울 것
처음으로 둘러본 방은 세 가지 모두 정말 마음에 들었지만 월세가 너무 비쌌다. 다음으로 둘러본 조용한 방은 너무 외진 곳에 있었다. 주차도 불편했고. 몇 군데 둘러봤지만 "딱 이곳이다" 싶은 곳은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살펴본 방, 창문이 유난히 커 채광이 좋았다. 회사와도 멀지 않고, 월세도 괜찮았다. 무엇보다 새 건물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넓진 않지만, 혼자 살기에 딱 좋은 방. 이 방에 들어서자마자 엄마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것이 둘 다 이 방이 마음에 들었다는 신호였다. 바로 계약했다.
며칠 뒤 춘천으로 이사 왔다. 아직 낯선 방이지만, 내가 덮던 이불을 깔아 두니 제법 '내 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다행스럽긴 했지만, 점차 걱정이 되었다. 이 낯선 도시에서 나 혼자 잘 살 수 있을까, 일은 금방 적응할 수 있을까. 다음날 첫 출근을 해야 했기에, 마음의 긴장은 더욱 컸다. 내일 입을 새하얀 와이셔츠를 다리며 새로운 직장에서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생각했다.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만, 자꾸 그 생각이 나는 것 보면 난 아직 갈 길이 멀다.
첫 출근 하던 날, 엄마는 나를 회사까지 데려다주었다. 회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긴장한 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폰에서 지워버렸다. 지우지 말걸 그랬다. 다 추억이 될 텐데.
낯설고 어색한 시간. 회사 곳곳을 둘러보며 인사를 드렸고, 내 자리도, 명함도 생겼다. 이후 며칠 동안 교육을 받았다. 선배들의 방송을 모니터 했고, 모니터 하면서 느낀 점을 방송 리허설에 반영하도록 노력했다. 라디오부터 TV 뉴스까지. 노련한 선배의 자상하고 꼼꼼한 지도 덕분에 긴장은 조금 풀 수 있었다. 그래도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집에 오면 녹초가 되었다.
교육기간 동안, "이것 만은 꼭 지키자"는 나만의 규칙을 세웠다.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되뇌는 주문이다.
"이것 만은 꼭 지키자"
1. 모르면 물어보자.
2. 나 자신을 믿자.
먼저, 모르면 물어보자. 새로운 환경에서 모르는 건 당연하다. 지금 모르는데 대충 아는 척 넘어간다면, 앞으로도 난 쭉 모를 것이다. 군 시절 상관의 지시에 대충 짐작으로 업무를 추진했다가, 크게 혼난 적이 있다. 이후에는 잠깐 싫고 곤란하더라도 자꾸 묻고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 이로울 뿐 아니라 주변의 상사와 동료들도 만족시킨다. 모른다고 무시받기보다는 오히려 업무에 관심이 많고, 정확한 사람이라고 존중받게 된다.
그리고, 나 자신을 믿자. 아나운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직업이다. 언제나 좋은 피드백을 받을 수는 없다. 준비생 시절에는 피드백에 굉장히 상처를 많이 받았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아나운서에 어울리지 않은 사람인가" 등 좌절했던 적도 많다. 단점만 보이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하지만 내 단점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인정한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피드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이런 단점이 있다, 그래도 나는 나를 믿어. 그 단점을 고쳐 나가면 돼."
나 자신을 의심하기보다는 믿으려고 노력한다. 나 자신을 믿되, 부족한 점은 하나 둘 천천히 고쳐 나가려고 한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즐기자!
사실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하긴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몰라도 아는 척하고 싶고,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며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하니까. 그래도 계속해서 되새김질한다. 부디 나 자신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첫 방송은 그다음 주말, 강원도 전역에 방송되는 <뉴스데스크 강원>으로 정해졌다. 두려웠지만 행복했다. 꿈꾸던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행운. [방송중(ON AIR)] 안내 표시등에 불이 켜지던 순간, 가슴이 터질듯한 떨림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가끔 리허설 영상을 찾아본다. 뉴스 리딩부터 헤어 스타일까지 도저히 못 봐주겠어서 오래 보지는 못한다. 그래도 그 행위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처음'의 마음가짐을 되살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