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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성희 Jan 05. 2022

여행

# 1. 시드니행 비행기


비행기가 드디어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창밖 풍경은 천천히… 그러다 점점 빠르게 움직인다. 몸이 의자의 깊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상공의 안정권으로 진입한 비행기 안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기장의 인사말과 함께 스튜어디스들이 좁은 기내를 바쁘게 움직였고 승객들은 좌석벨트를 풀고 각자의 편한 자세를 찾아갔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신는 사람, 깊은 잠을 잘 채비를 하는 사람, 화장실로 향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이 분위기가 그저 설레고 좋은 사람. 나였다. 그래.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혼자 장거리 비행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기분 좋은 설렘과 딱 그만큼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세 사람이 앉게 되어 있는 좌석에서 난 복도 쪽 좌석에 앉아있었다. 옆자리는 중년 부부가 앉아있었다. 우리 부모님 나이만큼의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좋아 다행이에요.” 먼저 인사를 건넸다. 딸과 비슷한 나이라며 어디 가느냐, 왜 가느냐, 거기에는 아는 사람이 있느냐…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그렇게 13시간의 설레는 비행이 시작되었다.     


# 2. 시드니 공항


내가 처음 내린 곳은 호주의 시드니 공항이었다. 이제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멜버른으로 가야 한다. 내가 타고 온 국적기의 승무원들이 지나간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괜찮냐고 그리고 괜찮겠냐고 묻는다. 괜찮은지, 괜찮을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와달라는 말은 목구멍 깊이 삼켰다. 그들은 충분히 도와줬고 나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승무원일 때 내가 승객일 뿐, 그의 일상에 나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할까? 가족에게 걱정만 시키는 일이 확실했다. 바로 옆 동네도 아니고. 시드니의 있다는 친구의 친구에게 전화해야 할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그럼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까? 13시간 비행은 어려울 것 같았다.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하고 가슴을 꽉 조이고 있는 브래지어를 풀었다. 운동화 대신 편한 슬리퍼로 갈아신고 다시 라운지로 돌아와 털썩 내려앉았다. 이미 예정된 경비행기는 놓쳤다. 빈 긴 의자에 몸을 뉘었다. 몸이 왜 이러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갈 수 있을까? 온전히 혼자인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조금 전 비행기 안에서 있던 일들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 3. 시드니행 비행기


주변이 시끄러웠다. 눈을 뜨고 싶어 살짝 눈을 떴다. 눈앞에 아니 정확히 말해 눈 위로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난 바닥에 누워있었다. 기내 방송이 들리는 걸 보니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 안인 것은 확실했다. 달라진 건 기내 방송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분주해진 분위기와 난 어딘가에 누워있다는 것이었다. 기내 방송은 긴급 의료진을 찾는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차갑고 뾰족한 물건으로 내 몸의 혈들을 찌르고 있었다.

“저… 일어났는데요…”

깨어났다고 말하기도 민망하게도 이 비행기 안의 긴급한 상황은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기억나세요? 쓰러지셨어요. 빈 좌석이 없이 이곳으로 모셨어요.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친절한 승무원이 이곳은 승무원이 쉬는 비행기 안의 장소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나는 다시 물었다. 기억을 조각들을 맞춰야 했다. 설렘으로 가득 찬 내가 왜 여기에 누워있는지 궁금했다.      


# 4. 시드니 공항


시드니 공항 라운지에 누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그래도 멜버른으로 가야겠다고 기운을 내기로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울고 싶었다. 도움이 간절했다. 이런저런 사정을 이야기하고 멜버른으로 가는 국내선 경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날 때와는 다르게 흐트러진 모습에 맥이 빠져 있었다. 검은 머리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찾았다. 혹시 한국인이신가요? 한국인이 아니라는 대답을 몇 번 들으니 도움을 청하는 내 모습이 처량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화가 나기도 했다. 1년일지 2년일지 얼마일지 정하지 않고 떠난 길이었기에 그만큼 짐도 커다랗고 버거웠다. 이민 가방이라고 불리는 제일 큰 여행용 가방은 비행기 화물칸이 맡아줬다 하더라도 기운이 한껏 빠져 도와줄 누군가만을 찾는 지금의 나에겐 내 몸만 한 배낭과 기내용 여행용 가방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 5. 시드니행 비행기


이제 시드니 도착이 얼마 남지 않았다. 드디어 호주의 땅에 내리는구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리기 전 마지막 기내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옆 좌석 아주머니는 식사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시겠다 하셨다. 다리를 살짝 모로 비틀어 아주머니가 나가시기 편하게 자리를 만들어 드렸다. 이 비행의 마지막 기내식이 좋은 냄새를 풍기며 나누어지고 있었다. 차례가 되어 받아 든 식사는 한식이었다. 뜨끈한 국물과 조물조물 나물과 김치와 김이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뜨끈한 국물이 내 몸속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나면서 속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멜버른에 도착한 세상은 평화로울 거야. 그림엽서에서 보던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은 정말 그렇게 노랗고 아름다울까? 시간이 된다면 시드니도 여행해야지. 호주에 왔는데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보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아! 지구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룰루에도 가서 오색 창연하게 변화하는 모습도 봐야 하고… 코알라랑 지천으로 뛰어다닌다는 캥거루도 진짜 볼 수 있을까?  코알라가 먹는다는 유칼립투스 때문에 산이 파랗다는 블루마운틴도 있다던데 거기도 가야지. 내 머리와 마음은 이미 호주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어느샌가 아주머니가 화장실을 다녀오신 모양으로 “얼굴색이 왜 이러니? 아이고 백짓장같네.”라고 물으신다. 그 물음과 함께 내 시야는 좁아지고 귓속에선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소리가 물러나 작아지고 있었다. 내가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 호주에 가야 하는데 몸이 왜 이러지?      


# 6. 멜버른행 비행기


멜버른으로 가는 작은 비행기는 기류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평소 같으면 무서워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기류에 흔들리고 있는 이 작은 비행기와 함께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지러움은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오히려 편하게 나답다고 느끼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지? 조용하고 예쁜 도시 멜버른으로 오기로 한 건 정말 딱 단 하나의 이유였다. 평화를 얻는 일이었다. 웃음까진 아니어도 울음을 대신할 곳이 필요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일들.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꿈을 꾸기 위해서였다. 가족을 대신해 내가 조금 더 힘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20대를 송두리째 써버린 후 나는 지쳐있었다. 그맘때쯤 세상에 사랑은 이것뿐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던 이유였다. 내 서러움과 울음을 모른 척했던 건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늘 괜찮다고 말했고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치지 않고 나를 강인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쉴 곳을 찾아 떠난 비행기에서 의식을 잃은 것처럼 난 삶에 의식을 잃고 있었다. 설레는 꿈을 안고 단단하고 제일 크고 멋진 비행기를 타고 안전하고 행복하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이곳이 낯설고 두려웠으며 내 것 같지 않았다. 끝까지 가족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지친 나를 이기지 못하고 떠나 온 길이 마음에 걸려있었다. 마지막 기내식이 위에서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급체를 일으킨 것처럼. 나의 찬란한 젊음의 시간을 아름다운 사랑이라 생각한 채 거부되어 흐르지 못한 마음처럼. 내 혈관의 혈액들은 순환하지 못해 나를 기어코 쓰러뜨렸다.     


# 7. 그리고 멜버른


후회는 하지 않는다. 상처와 힘겨움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못 본 채, 가리면 나도 잊고 웃을 거라 믿고 떠난 여행길을 후회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제때 만져주고 제때 보살펴주지 못해 체하고 순환이 멈추게 하지는 않는다. 멜버른으로 향하던 작은 비행기의 흔들림에서 나를 느끼고 나를 받아들이던 그 어지러움을 기억한다. 그 어지러움은 두려움도 불안함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나를 온전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 작은 비행기는 그 어지러운 기류를 한껏 타고도 도착지인 멜버른에 무사히 안착했다.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며 흔들리던 기체는 안전하게 멈추었고 그렇게 내려서 본 멜버른의 하늘은 파랗게 시원했고 높았다. 또 여기 멜버른에서 난 흔들리고 또 꿈을 꾸고 애를 쓸 것이며 사랑을 할 것이다. 어지럽게. 그러다가 또 쓰러질 수도 있겠지. 괜찮다. 죽지 않는다. 일어나면 다른 여행은 또 기다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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