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속 미스터리
길상사는 시인 백석과 그를 사랑했던 기생 자야 김영한의 러브스토리가 깃들어 있는 사찰이다.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요정이었다. 대원각 여주인 기생 김영한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수필집을 읽고 그의 정신세계에 반해 법정스님에게 당시 천억 원가량의 대원각을 시주하겠노라 했다. 법정스님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 후 10년여를 법정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그녀의 끈질긴 설득 끝에 마침내 요정 대원각은 길상사 사찰로 거듭나게 된다. 술냄새와 고기 냄새로 찌들었던 요정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청정도량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대원각이라는 요정은 친일 기업인이었던 백인기의 별장이었고, 백인기의 애첩이었던 기생 김영한 여사가 이를 물려받아 대원각이라는 이름으로 요정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원각에는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 주로 거물급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대원각을 운영하면서 김영한은 많은 부를 획득했다.
김영한 여사의 운명도 기구하다.
집안이 가난했던 김영한은 열다섯의 나이에 일찍 시집을 갔지만, 남편이 정신 이상으로 우물에 빠져 죽었다. 그 후 그녀는 기생 수업을 받아 기생이 되었다. 이때 얻은 기명(妓名)이 '진향'이다. 빼어난 미모에 글재주도 뛰어났던 그녀는 일제강점기 조선을 홍보하는 엽서의 모델이 되기도 하고, <삼천리> 잡지에 수필을 기고하기도 했다.
한편 시인 백석은 일본 유학 후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함흥 영생여고 교사로 부임하고 있었다. 한 회식자리에서 우연히 진향(김영한)과 함께 앉게 되었고, 서로 첫눈에 반한 그들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후 그들은 동거에 들어갔고, 백석은 김영한을 '자야(子夜)'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김영한 여사의 말에 의하면, 백석 시인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지어 그녀에게 들려주며 사랑의 밀어를 나누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동거 소식을 들은 백석의 아버지는 강력히 반대하며 백석을 강제로 결혼시킨다. 그렇지만 백석은 이를 마다하고 첫날밤 신부를 홀로 두고 김영한에게 간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구절처럼 백석은 자야에게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백석의 앞길을 막는다고 생각했던 김영한은 백석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기생 신분인 그녀가 백석의 앞날에 누가 될까 하여 이별이라는 선택을 한 것도 있겠지만, 당시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버려두고 백석과 떠나기에는 모든 복합적인 문제가 얽혀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는 수 없이 백석은 자신이 먼저 만주로 가서 자리를 잡은 후에 그녀를 부르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그 후 6.25가 터지고 38선이 막히면서 둘의 사랑은 영영 만날 수 없는 머나먼 강이 되어 버렸다.
백석(1912~1996)은 본명이 기행(夔行)이고 호는 백석(白石)이다. 평안북도 정주태생이며 백석의 부모는 오산학교 앞에서 하숙을 치며 생계를 꾸렸다. 백석은 오산학교를 마치고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고보에 입학했다. 그곳에는 민족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과 벽초 홍명희 등이 교장으로 있었다. 1930년 백석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단편 「그 모(母)와 아들」을 써서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최연소 나이로 당선되었다.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그는 조선일보 사주의 도움을 받아 장학생으로 뽑혀 일본 도쿄에 있는 사립명문 아오야마학원 영어 사법과 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는 통의동에 하숙을 정하고 1934년 조선일보 교정부에 입사한다. 얼마 후 출판부로 옮겨 계열사 잡지 『조광』에서 편집을 보며 일했다.
백석은 1935년 8월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는 「여우난골족」, 「통영」 등 그간 『조광』에 발표한 시를 모으고 보태서 1936년 1월에 첫 시집 『사슴』을 펴냈다.
백석이 남긴 시집은 『사슴』이 유일하다.
1936년 1월에 나온 사슴은 김기림의 말대로 새해 벽두에 ‘시단’에 던진 폭탄이었다.
시집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혹평’으로 엇갈렸다.
백석은 당시 고급 양복에다 비싼 양말을 신고 다닐 만큼 멋쟁이면서 호사스러운 사슴이었다. 식사 때는 깨끗한 식당만 찾았고 지저분한 것은 싫어해서 으레 전화기는 손수건으로 싸서 받을 정도로 괴벽스럽고 신경질적인 면이 있었다.
백석과 헤어지고 남에 남겨진 기생 김영한 여사는 요정 대원각을 운영하며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바탕으로 엄청난 부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마음은 자나 깨나 백석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백석의 생사를 알 수 없었던 그녀는 백석의 생일인 매년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으면서 그를 기렸다고 한다.
요정 대원각을 시주한 김영한 보살에게 기자가 물었다. 천억이 아깝지 않으냐고.
그러자 김영한 여사는 말한다.
'그깟 천억,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하다.'
그녀는 길상사에서 수양하며 지내다가 생을 마감한다.
그녀는 유언으로 이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길상사의 스님 말씀에 따르면 눈이 소복이 내리는 날, 그녀의 유골을 뿌리는 의식을 치러 주었다고 한다.
김영한 여사는 백석이 자신을 위해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지어 주었고, 그 시의 주인공은 자신이라 여겨 백석을 그리워하며 눈을 감았을 것이다.
필자도 김영한의 백석을 향한 애절한 사랑이 안타까워 기생 김영한의 시점으로 글을 썼던 내용을 공개한다.
* 빈방을 홀로 지키고 앉아 외롭게 굴러가는 나뭇잎 소리, 창문 흔드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발자국 소리 들리면 소스라쳐 일어나 앉으며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습니다.
어딘지 모를 먼 길을 돌아 기별 없이 불쑥 당신이 들어서지 않을까, 어느 날 불현듯 무심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당신을 기다리는 목마름은 늘 가시지 않았습니다.
두 눈을 감으면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당신 목소리, 그 음성 너머로 밀려드는 그리움.
당신을 향한 기다림이 까맣게 재가 되어 바람으로 흩어지던 날, 행여 꿈속에서라도 만나볼 수 있을까 희미한 꿈속을 헤매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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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서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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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게 지어 준 시를 읊으며, 당신과 마가리에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내 생은 이렇듯 당신과 이별하여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나 봅니다.
한날한시도 잊지 못했던 당신.
이 세상 뜨는 날 비로소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길상사에 기부한 천억이 아깝지 않으냐고.
그깟 천억은 당신 시 한 줄 만도 못한 헛된 것.
다 부질없는 빈 수레 같은 것.
내가 죽으면 화장하여 눈 내리는 날 뿌려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난 이제야 가벼워져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푸른 보리밭길 지나 먼 산기슭을 휘돌아 이제야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동안 우리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가 시인 백석이 기생 자야(김영한)에게 지어 준 시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설가 최정희(1906~1990)가 죽고 나서 그녀의 유품에서도 백석의 편지와 시가 발견되었다. 소설가 최정희의 유품 속에서 나온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그녀는 죽기 전까지 그 시를 간직하며 백석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 당시 문인들과 기자들은 백석 시에 나와 있는 나타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라는 호기심으로 관심이 증폭됐고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과연 그 시에 나타난 나타샤는 누구였을까?
백석의 시에 매료되어 평생 백석의 삶을 추적한 기자 송준의 글을 보면, 백석은 정식으로 다섯 번 결혼한다. 두 번은 부모의 강요에 의한 것이고 나머지 세 번은 장정옥, 문경옥, 이윤희라는 여자였다. 여기에다 ‘자야’로 불리는 기생 김진향(1916~1999)과의 동거까지 더하면 백석의 여인들은 모두 여섯 명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높고 쓸쓸하고 잘 생긴 사슴 백석은 여성문단의 ‘모던 걸’로 불리는 최정희,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등의 중심에서 늘 ‘사슴’으로 불리며 관심을 끌었다.
노천명 시인의 <사슴>이라는 시의 첫 구절에 보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는 시구가 나온다. 학교 다닐 때 나는 그 시를 달달 외우고 다녔다. 알고 보니 그 사슴은 백석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 당시 문단에 활동하던 여성 문인들의 가슴에 백석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나타샤의 진짜 주인공'은 백석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첫사랑 박경련일까? 아니면 기생 김자야일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백석이 써준 시와 편지를 간직하고 있던 소설가 최정희일까? 그것의 진실은 백석 본인만이 알 것이다.
북으로 간 백석의 생사를 알 길이 없었던 남한에 있는 문인들은 백석이 숙청됐을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백석 연구가로 알려진 기자 송준이 백석의 자료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당시 백석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구를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조선족 취재원에게서 백석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백석은 1945년 북한에서 마지막 부인인 이윤희를 만나 결혼한다. 백석의 나이 서른넷, 부인은 스무 살이었다. 북에서 그는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해 시 창작을 포기하고, 번역과 아동문학 창작에 전념했다.
백석은 조선작가동맹에서 쫓겨나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 협동농장에서 양을 돌보는 일을 했다. 주로 양털을 깎고 새끼를 늘리는 일이었다. 백석은 붓을 꺾고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일을 배우고 틈틈이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삼수군 사람들도 그를 따르고 존경했다고 한다. 백석은 85세까지 장수했다. 그가 죽자 평양의 문인은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았고, 그를 흠모하는 지역 농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백석은 그의 시와 같이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원고를 모두 태워버리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미 그의 문학은 오래전 만주 북방에서 막을 내렸던 것이다.
* 참고문헌: 윤길수 < 운명, 책을 탐하다> 궁리 출판, 2021.
https://youtu.be/AGOWnsuRDNA?si=85PG0_yw1_RnCWQ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