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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과 명상의 다산 초당 길

울분과 한숨을 희망과 용기로 승화시킨 다산 정약용이 걷던 길

by 정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가 없이 야트막하고 부드러운 능선길로 이어져 있다.

다산 정약용이 수없이 오갔을 이 길은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사색하기 좋은 명상길이다.

봄빛에 젖은 골짜기 사이로 보드라운 봄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길은 새로운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습기를 듬뿍 머문 초목들이 앞다투어 연초록 새순들을 틔어내기 시작하는 길을 걸으며 봄의 싱그러움을 느낀다.


해마다 이맘때쯤 연둣빛 싹이 올라오는 이 시기를 나는 좋아한다. 한여름의 짙은 초록물에 뒤덮인 나뭇잎보다 마른 가지를 뚫고 나오는 솜털처럼 연약하고 보드라운 새순이 올라올 때의 나뭇잎들은 너무 귀엽고 청초하다.

다산 초당으로 가는 길

다산 정약용은 이 길을 오가며 얼마나 많은 울분과 한숨을 토해냈을까.

나뭇잎 하나하나가 눈물이고 욕망이고 기도였을 것이다. 18년이라는 유배 생활은 그에게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 불행을 극기로 승화시킨 열정은 엄청난 학문적 성과를 이루게 된다.

다산 초당으로 오르는 길에 드러나 있는 뿌리의 길

다산초당으로 오르다 보면 뿌리의 길이 나온다.

나무뿌리가 드러나 있어 밟고 올라가기가 마음이 짠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밟고 간 것일까. 땅 위에 드러난 나무뿌리가 사람들 발길에 밟혀 반들반들하다. 더러는 서러움에 눈물 흘렀을 것이고, 때로는 부드러운 바람과 포근한 햇빛으로 위로받았으리라. 시인 김소월이 나 보기가 역겨우면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 했던, 진달래꽃을 밟고 가는 심정이 이러할까. 다산 정약용 선생도 이 나무뿌리를 즈려밟고 산길을 오르내렸을까. 상처받은 나무뿌리에게 더 아픔을 줄 것 같아 조심조심 밟으며 걷게 된다.

나무뿌리들이 그대로 드러난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덧 다산초당에 당도하게 된다.

다산 정약용이 신유박해강진에 귀양을 와서 18년 중 10년 동안 생활하던 집이다. 그는 유배가 끝날 때까지 이 다산초당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한 끝에 목민심서를 비롯한 숱한 저서들을 남겼다.

다산 초당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1789년 관직을 시작한 그는 정조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으며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이익으로부터 쭉 내려온 실학사상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자, 노론 대신들이 집요하게 방해를 했다. 노론들이 정약용의 사상을 거부하는 명분 중 하나가 바로 서학이었다. 관직에 있는 동안 내내 서학 추종자라고 비난을 당했지만 정조의 사랑과 신임이 두터웠던 다산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1800년 다산을 총애했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고,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신도인 남인이 여러 명 처형을 당했고 다산 정약용도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다산이 처음 강진 유배지에 도착했을 때, 관가의 삼엄한 관리를 받는 정약용을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 주막과 제자의 집에서 전전하던 중 윤 씨 집안의 허락으로 이곳 다산초당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다산 선생은 이곳에 머물면서 제자들과 500여 권의 저서를 집필했다.「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같은 대작을 내놓으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고 대 실학자로 우뚝 서게 된다. 경세유표는 조선의 개혁의 방향을 논한 책이고, 목민심서는 수령이 갖춰야 할 덕목을 제시한 책이며, 흠흠신서는 조선의 법률을 연구한 책이다.

이로써 다산초당은 조선 최고의 문화 성지가 되었다. 다산초당은 1963년에 사적 제107호로 지정받았다.

다산초당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름의 초당(草堂)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는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복원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중건하였다. 강진군에서는 다시 이를 초가집으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아직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이다.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두 아들과 형, 제자들에게 수시로 편지를 썼다. 가족 간의 윤리, 이웃 간의 인간관계, 친구 사귀는 일, 공부하는 목적과 방법, 삶을 살아가는 지혜들을 알려준다. 다산이 쓴 편지 중 제자에게 쓴 마지막 편지는 심금을 울린다.

“준엽이(제자 손병조)는 이미 고인이 됐고 안석이(제자 황경)는 여태 서객(書客)으로 있으니, 하나는 슬프고 하나는 불쌍하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아프다. (내) 부고를 듣는 날 군(황상)이 마땅히 연암(제자 황지초)과 함께 산중에서 한 차례 울고 지난 일을 얘기하며 함께 그치도록 해라….”


다산의 마지막 편지는 다산이 1836년 2월 22일 타계 직전, 제자들이 힘들 것을 염려해 부고를 들어도 오지 말고 산중에서 한 차례 곡하는 것으로 문상을 대신하라고 당부한 스승의 애절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제자 황상은 이 편지를 지니고 강진으로 가던 중 스승의 부고를 듣고 발길을 되돌렸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스스로 지고 가야 할 짐이 있다. 그것은 오롯이 자신만이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다산 선생은 유배를 오게 되어 어려워진 집안 형편으로 힘들어하는 아들들에게도 "아무리 힘들고 불합리한 일을 당했더라도 가슴에 품은 뜻을 꺾지 말라." 했던 아버지였다. 그는 남에게 떠넘길 수도 없는, 등에 찰싹 달라붙어 떼려야 뗄 수도 없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서도 항상 꿈과 희망을 전했던 메시아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 백과>

-참고 문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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