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나는 봄만 되면 스멀스멀 온몸이 뭔가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열망으로 들뜨고 있다.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나고 싶고, TV에 봄꽃 소식만 나와도 가슴이 두근거리며, 떠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봄기운에 도취된다. 남도 끝자락 어느 이름 모를 섬에 붉게 피어있는 동백꽃을 보고 싶어 안달이 나고, 떨어지는 동백꽃의 처연함을 보며 실연당한 여인의 마음처럼 가슴 저 밑바닥에 쓸쓸한 바람이 분다.
봄이 오면 봄꽃 향기 풋풋한 들판으로 가고 싶어 싱숭생숭해진다. 가지 위에 연초록 새싹이 움트는 고운 숲 속으로, 어느 이름 모를 작은 새 조잘대는 풀무덤으로 가고 싶어 마음이 들뜬다. 마치 내가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처럼,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여자처럼, 홀로 그 봄을 오롯이 느끼고 싶은 마음으로 달아오른다. 바람난 여자처럼.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바람난 여자처럼 남도로 도망치고 말았다. 누가 손가락질을 해도 어쩔 수 없다는 배짱으로 길을 나섰다. 과연 그곳엔 벚꽃들이 팝콘처럼 오글오글 나뭇가지에 붙어 나를 좀 보라는 듯 뽐내고 있었다. 벚꽃가지 늘어진 군락지를 지나며 꿈결에 도취된 듯 탄성이 새어 나왔다.
여수 금오도는 동백꽃이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때론 선혈처럼 송이채로 툭툭 떨어져 내 발길을 머물게 했다. 연초록 새싹이 움트는 고운 숲 속을 걷다가, 새소리 조잘대는 소리 들으며 달콤한 행복을 만끽했다. 낭창해진 버드나무에 연두색 새순이 돋고, 온 세상이 봄꽃으로 물드는 이 봄. 내 마음도 이 봄처럼 화들짝 피어날 수는 없을까. 내 안의 열망이, 내 안의 희망이, 내 안의 행복이 이 봄꽃처럼 활짝.
지난주에 남도에 다녀온 이후, 이제 우리 동네가 꽃동네가 됐다. 온 세상이 황홀한 꽃물결 속에 잠긴 것 같다. 삭막한 도시의 거리거리에는 꿈결처럼 곱디고운 봄꽃이 피어오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허공에 안개가 뿌옇게 서려있다. 바람이 안개를 흩뿌려 이슬비라도 내리려는 듯 봄의 촉촉한 기운이 물씬 풍긴다. 연초록 기운이 움트고 있는 어린 나뭇잎들은 햇병아리의 솜털처럼 보드랍고 앙증스럽다.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꽁지를 깝신거리며 포르륵 포르륵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다.
봄볕이 따사로이 내리쬐는 날, 진달래꽃 만발한 진달래동산을 찾았다. 그곳에는 꽃을 보려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물결에 밀려 저절로 발걸음이 두둥실 옮겨졌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나무 아래 서 보았다.
이렇게 연한 꽃잎이 어떻게 저 딱딱한 나뭇가지를 뚫고 나오는 걸까. 한 송이 꽃을 피워내기 위해 겨우내 거센 눈보라와 꽃샘추위를 온몸으로 받으며 견디어냈을 자연의 신비로움에 숙연한 기분이 든다. 바람이 불자 꽃이파리가 살랑살랑 떨어져 내렸다. 떨어진 꽃봉오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여리고 가녀린 작은 꽃잎에도 수술과 암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꽃모양을 이루고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떨어지는 꽃송이의 모습은 애잔해 보인다. 찬란하게 피어있을 땐 피어 아름답지만 떠나갈 땐 너무도 짧고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들의 삶이 안타깝다. 새롭게 피어나고 지는 꽃들의 삶이 우리네 인생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우리 주위엔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다. 온 도시를 휘황하게 물들이며 피어나는 봄꽃들의 향연과 낙화, 아침잠을 깨우며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 초봄의 싱그런 빗줄기, 이러한 아름다움을 어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아직도 이 세상에는 내가 사랑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모르는 가치가 얼마나 많으며, 내가 모르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은지. 소중한 자연의 가치로 삶을 사랑하는 또 다른 지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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