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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도시 런던

by 정윤

런던 히드로 공항은 안개에 휩싸여 몽환적인 모습이었다. 뿌연 안개에 덮인 도시의 모습은 사물의 분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안개가 90일 이상 낀다는 영국 날씨, 190일 이상 비가 내린다는 도시. 비 내리는 모습도 주룩주룩 내리는 게 아니라 가느다랗게 보이지 않는 실비가 알게 모르게 희뿌연 공간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안갯속을 스치고 런던행 버스에 올라탔다. 고속도로도 안개에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안개에 휩싸인 템즈강

안개에 뒤덮인 템즈강도 국회의사당도 낭만적인 모습이다. 안개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 않으니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갯속에 서 있으니 내 마음도 젖어드는 것 같다. 안갯속 런던은 희뿌연 막이 가로막고 있긴 하지만 도시 전체가 질서 정연했다. 거리의 분위기는 반듯하고 깔끔했다. 하지만 그들은 도도했고 섣불리 다가가기 힘든 위엄이 서려 있었다. 큰 나라가 주는 위압감인가?


안개는 모든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때로는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지만, 오히려 가린 시야 때문에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떠나왔지만 이곳의 안갯속을 거닐다 보니, 눈앞의 일들이 명확히 보이지 않아도 너무 조급해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천천히, 있는 그대로 순응하는 법을 안개에 휩싸인 낯선 거리에서 깨닫게 되었다.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건물과 사물들, 그 시야의 정적인 고요함은 나의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 어떤 행동을 해도 방해받지 않은 이 거리. 이렇듯 하염없이 돌아다니고 서성거려도 누구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는 이런 여행이 나는 좋다. 더구나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안개가 희뿌연 거리를 걷는 기분이라니.

런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느긋하고 여유로워 보인다. 공원에 누워 있는 개들조차도 느긋하고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다. 여기도 사람사는 곳이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왜 이렇게 모두들 여유롭고 편안해 보이는 걸까. 아침 출근 시간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시달리며 다급하게 출근하는 한국의 직장인들, 학생들. 우리나라 사람들과 너무나 대비되는 풍경들이다.

정오가 지나자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안개가 젖히자 질서 정연한 런던 거리가 더 뚜렷하게 보인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가장 유학 오고 싶은 곳이 영국이라고 한다. 영국 학교는 우리나라처럼 공부를 우선시하지 않고, 취미가 세 개 이상 되지 않는 사람은 학교에 들어올 수 없게 한다고 한다. 취미를 계발해서 특기를 만들고 그 특기를 살려 전공을 하게 하고, 잘하면 장학생으로 지원을 해준다니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가. 한국의 입시 지옥과 비교하면 너무나 부러운 시스템이다. 자신의 특기나 재능과는 무관하게 점수에 맞춘 전공을 해서 중도에 그만두는 한국 학생들의 실정이 안타깝고 영국의 학생들이 부러웠다.

런던에 있는 공원

런던의 안개는 단순히 자연의 한 부분을 넘어, 나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살아가다 보면 내 본연의 모습이 흐려질 때가 있다. 때로는 내가 지워져 보이지 않거나, 타인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나를 충전할 수 있는 장소로 떠나오곤 한다. 혼자인 상태,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 정신적 긴장감을 완전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곳. 놀러 가기 위해서는 하나보다 둘이 좋고, 둘보다 셋이 좋다. 하지만 자아를 회복하고 자신을 온전하게 힐링하고 싶다면 혼자 가는 게 좋다.


이국적인 거리를 걷다가도 언뜻언뜻 미아가 된 우주인처럼 끝도 없는 공간과 시간 속을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혼자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문득, 길 위에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만난다.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날 때도 있고, 스무 살 시절의 나를 만날 때도 있다. 잃어버린 나를 만나서 또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부르는 곳, 내가 나를 만나는 곳, 내가 나를 되찾는 곳. 나는 내가 그리울 때마다 나를 찾아 길을 떠난다.


런던의 안개는 뜻하지 않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안갯속을 걷게 될 줄은. 해결되지 못한 일들을 풀어헤쳐놓은 채 떠나온 터라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나마 안정이 되었다. 남에게 신경쓰느라 미처 들여다 보지 못했던 진정한 나, 꾸밈없는 나를 만나는 여행은 고독하지만 값지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나에게 이런 강인함이 숨어 있을 줄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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