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1월, 나는 파리 에펠탑 앞에 서 있었다.
남편이 떠난 지 1년 3개 월만이었다. 아침 출근길, 심정지로 쓰러진 남편은 회생하지 못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파리 만국 박람회를 개최했는데, 그 상징물로 프랑스 공학자 귀스타브 에펠이 자신의 이름을 딴 에펠탑을 건축하였습니다. 착공 초기부터 도시미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흉물스럽고 추악한 철 구조물'이라는 비난이 많았고 철거될뻔한 위기도 있었죠. 하지만 1985년 야간 조명시설이 설치된 이후, 오늘날 아름다운 파리 야경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매 시각 정각부터 약 10분간 에펠탑이 반짝거리는 쇼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밤에 다시 이곳으로 와서 유람선을 타고 에펠탑을 볼 예정입니다.”
일밖에 모르던 남편은 비행기 한번 타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단 한 번뿐인 삶인데, 왜 그리 여유 없이 앞만 보고 살았던 것일까. 30년 동안 한 직장을 다니며, 어깨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한 채 왜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 나 역시 아이들을 키우며 맞벌이를 하느라 힘들었지만, 아파트 대출 이자, 아이들 학원비, 늘어나는 생활비들을 감내하며 고단한 삶을 이겨나갔다. 일 년에 휴가가 두 번 밖에 되지 않은 남편은 여행 대신 시댁에 내려가 농사일을 거들자고 했다. 시댁에 가지 말고 우리끼리 가족 여행 한 번 가자고 하면 나를 철없는 마누라 취급하며 못마땅해했다. 우리는 나중에 여행 많이 갈 수 있지 않느냐며, 부모가 언제까지 우릴 기다려주겠냐던 남편은 부모보다 더 먼저 가버렸다. 나도 열심히 살았는데, 남편은 나에게 미안하지 않았을까. 자기 만나서 고생하며 사는 아내가 안쓰럽지도 않았을까. 그런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왜 그리 인색했을까.
“나, 사랑해?”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나?”
항상 그런 식이었다.
과묵한 편은 아닌데도 이상하게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말에는 인색했다. 나는 그게 제일 서운했다.
남편이 불시에 떠나고 나자 나는 심장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죽은 게 아니라 퇴근하고 금방 들어설 것만 같고, 출장갔다 오듯 현관키를 누르고 불쑥 들어올 것 같았다. 처음엔 실감하지 못했던 남편의 부재가 날이 갈수록 뼈에 사무치게 새겨졌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칩거에 들어갔다.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고 휴대전화를 꺼놓고 살았다. 낮에는 종일 침대에 누워있다가 저녁 어스름이 지면 밖으로 나와 칙칙하게 구름 덮인 하늘을 보며 하염없이 걸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던 삶이 허망했고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이들과 먹고살아야 한다는 절박감과, 이 세상 어디에도 내편이 없다는 막막함이 나를 위협해 왔다.
어느 날 여행 프로에서 파리 에펠탑을 보게 되었다. 어둠으로 물든 밤에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자 내 안에 숨죽이고 있는 세포들이 살아 꿈틀거렸다. 그 순간 집을 벗어나고픈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 길로 여행사에 신청하고 여권 발급을 받았다. 생애 처음으로 가보는 서유럽 패키지여행이었다. 함께하게 된 패키지 일행은 쌍둥이 식구들이 넷이고, 신혼부부가 세 쌍이었다. 그리고 또 작년에 결혼한 젊은 부부, 환갑 기념으로 온 부부 다섯 팀이었다. 그들은 혼자 온 나를 신기해했다.
“왜 혼자 왔어요?”
“나 원래 혼자 잘 다녀요. 이상한가요?”
“그래도 그렇지, 가족들하고 같이 오든지, 친구들하고 같이 와야지 혼자 오면 안 심심해요?”
정작 혼자 온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상한 시선으로 자꾸 묻는 그들의 시선이 오히려 불편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베르사유 궁전 내부관람을 했다. 13개의 방으로 꾸며진 화려하고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궁전 내부를 돌아봤지만 별로 감흥이 없었다. 기나긴 줄로 이어진 여행객들 틈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콩코드 광장을 구경하고 로뎅 박물관 관람을 했다. 몽마르트르 언덕길을 오르며 화가들의 그림들을 구경했다. 남들처럼 사진도 찍고 겉으론 명랑한 척 웃으며 다녔지만 적막감은 가시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
마음 밑바닥에 그 생각만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이들과 먹고 살길이 막막한 내가 이렇게 여행을 다녀도 되나? 남들이 뭐라고 할까. 그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다.
밤이 되어 우리 일행은 바토무슈 유람선을 탔다. 유람선은 센 강을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둠으로 물든 파리의 에펠탑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지고 에펠탑은 휘황한 불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풍경 보지도 못하고 가버린 남편.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얼마나 짐스러웠을까. 떨쳐버릴 수 없었던 부담감, 능력 없는 부모를 부양하지 못한다는 죄책감. 마누라를 고생시킨다는 미안함 때문에, 너무 미안해서 말을 못 했던 것은 아닐까.
에펠탑의 불빛은 파리의 밤하늘을 휘황하게 장식했다. 그때 강너머에 남편의 환영이 떠올랐다.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남편이 손을 흔들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 거기서는 편히 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