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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열의 나라 스페인

by 정윤

론다 누에보 다리


누에보 다리는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남부 말라가 주에 속한 도시 론다(Ron da)의 절벽 위에 세워진 다리이다. 해발 723m 고원에 위치한 도시 론다의 풍경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협곡으로 나뉘어 소통이 어려웠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잇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1735년에 세웠던 다리가 무너진 뒤 새로 짓기 시작해 40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 때문에 '새것'이라는 뜻의 누에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그라나다에서 버스로 두 시간 반을 달려 해발 723m 고원에 위치한 아름다운 절벽의 도시 론다로 이동했다. 120m 높이의 까마득한 협곡 밑바닥까지 닿은 거대한 다리는 그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현지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헤밍웨이가 종식 후 살았다는 집이 절벽 끝쪽에 있다고 했다. 헤밍웨이는 이곳에 머물며 론다와 누에보 다리를 배경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그의 경험을 토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유는 삶과 죽음을 걸고 싸워야 하는 주제이며 온 인류의 형제애는 불가피한 현상이 된다”라고 주장하며 인류애를 호소하고 있다.

120미터 높이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누에보 다리는 높고 웅장해서 다리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현기증을 일으켰다. 웅장하고 장엄한 바위 덩어리 위에 42년 동안 벽돌을 쌓아 완성했다는 다리 모습은 다리라기보다는 웅장한 조형물처럼 멋스러웠다. 하지만 절벽 위에서 벽돌을 쌓느라 공사 중에 50명의 인부가 죽었다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니 음울하고 처연한 기분이 들었다. 또한 전쟁 포로들을 이 누에보 다리 아래 절벽 계곡으로 떨어뜨려 죽였다는 말을 듣고 까마득한 협곡 밑바닥을 내려다보니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로 무섭고 아찔했다.

수십 년 동안 가장 빈번하게 사진 촬영의 대상이 되었으며 현재도 전 세계 사진작가들이 선호하는 장소인 누에보 다리. 전쟁 때 희생되어 간 포로들과 공사하면서 죽은 슬픈 영혼들은 지금 어느 곳을 떠돌고 있을까. 처연함과 장엄함과 웅장함이 만들어낸 누에보 다리의 압도적인 풍경 위로 지어진 하얀 집들은 지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생업에 활기를 띠고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다.


안달루시아 플라멩코


플라멩코(Flamenco)는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유래한 춤(Baile), 노래(Cante)와 기타(Guitarra) 세 파트로 구성된 민속예술이다. 주로 집시들과 가난한 하류층 민들이 즐기던 음악과 무용이 예술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이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특징을 가진 형태로 구분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세 파트가 모두 합쳐진 형태보다 플라멩코 스타일의 기타 음악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초기의 플라멩코는 팔마스와 함께 하는 춤과 노래가 전부였다. 은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음악 플라멩코는 집시들의 거주지인 동굴이 무대였는데, 지금도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동굴’이라는 뜻의 쿠에바(Cueva) 플라멩코 공연장들이 있다. 플라멩코가 세상 밖으로 나와 기타와 만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9세기 중반 세비야에 카페 칸탄테(Cafe Cantante)라는 플라멩코 카페가 생겨나면서 뮤지션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이는 기타의 도입과 함께 플라멩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1950년대 중반에 생겨나기 시작한 타 블라오(Tablao)라는 이름의 극장식 레스토랑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만날 수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안달루시아에서 본 플라멩코 공연은 너무 강렬했고 무대 장악력이 뛰어났다. tv나 유튜브 영상으로 단편적인 춤만 봐왔던 나는 큰 기대 없이 공연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의 춤은 단순히 흥에 겨워 추는 춤이라기보다 왠지 처연했고 진실된 힘이 느껴졌으며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며 살아왔던 집시들의 깊은 한이 배어 있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응축되어 있던 한과 설움이 폭발하듯 그들은 진지했고 설움의 덩어리들을 온마음 다해 열정적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가 그들의 춤을 관람하던 나는 그들의 화려한 발동작과 정열적으로 땀을 흘리며 표현하는 추임새에 압도되어 찡한 감동이 전해져 왔다.

그동안 내가 상상했던 집시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떠돌이 방랑자였다. 하지만 해외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집시들의 모습은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스치게 된 소매치기가 대부분이었으며, 가이드들이 조심하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는 사람들 역시 집시들이었다.


이번 스페인 여행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집시에 대해 조금 더 상세히 알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 떠돌아가며 살고 있던 집시 민족들의 사고방식은 내 것도 내 것, 남의 것도 내 것, 이라는 소유의식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오랜 유랑 생활의 특성상 공동 소유를 당연히 여기다 보니 도둑질에 대한 죄의식이 전혀 없고,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에 아주 능숙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대부분의 집시들은 도움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집시들을 도움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으니 오히려 당신들이 우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은 유럽사람들의 동의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여기저기서 끌려온 범죄 집시들은 화형이나 극형에 처해졌다. 유럽인들의 집시에 대한 편견은 대부분 게으르고 교육 수준이 낮아 언제라도 범죄의 우려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공교육을 거부하고 있고 본인들이 자체 거주지역에 모여 독립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거나 사회활동을 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집시들이 여전히 빈곤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한 남, 동유럽 지역에서는 여전히 소매치기나 경범죄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아 집시들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히 팽배하다. 어쨌든 그들은 갖은 차별과 편견 때문에 그들의 억압된 설움과 한을 춤으로 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도 웃지 않았고 슬픔을 가득 담은 표정이었다. 그들의 춤사위는 떠돌이 생활을 그대로 담은 눈물겨움이 묻어나는 동작이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계속되는 음악과 춤의 향연은 그대로 열정의 도가니였다. 댄서의 발소리, 손뼉, 찰랑거리며 움직이는 치맛자락,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까지 하나가 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볼륨감 있는 몸매로 발을 힘차게 구르며 격정적으로 추는 춤이 끝날 때마다 관객들은 올~~ 레!로 호응하며 박수를 쏟아냈다. 춤추는 그들의 모습은 삶의 애환을 몸짓으로 표현해 내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그들의 춤에 압도되어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게 만드는 몰입감으로 감동을 느끼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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