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바르셀로나 중심부에 위치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그곳에 들어갔을 때 첫 느낌은 기가 막힐 정도로 웅장하고 경이로웠다. 어쩜 이럴 수가 있지? 도대체 이걸 인간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붉고 푸른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환상적인 느낌이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자태를 보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성당 내부는 나무와 꽃이 피어있는 숲 속을 거니는 것 같았다. 숲사이로 비쳐드는 것 같은 햇살의 느낌은 다채롭고 신비로웠다. 그것들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 같았다. 시간에 따라서 들어오는 햇살의 느낌은 햇빛이 들어오는 각도와 스테인글라스의 조화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찍어대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도 나는 너무나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찰나의 순간을 사진을 찍으며 낭비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마음속에 내 눈 안에 담아보고 싶은 귀한 순간이었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스페인 카탈루나에서 태어났다. 가우디는 어릴 때부터 대장장이였던 아버지와 할아버지 작업장에서 일을 도와주다 쇠를 다루는 능력과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자연 친화적인 시골에서의 생활은 그의 건축스타일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바르셀로나 건축학과 졸업 후 바르셀로나에 건축 사무소를 개업했다.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어느 날, 사업가인 구엘 백작을 만나게 되는데, 가우디의 천재성을 알아본 구엘은 그의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가우디의 후원자가 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구엘 저택은 가우디의 첫 번째 건축물이다. 그 후 이곳저곳에 독창적인 건축물을 세우던 가우디는 스페인 최고의 건축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건축 당시 가우디는 자신의 재산을 전부 성당 건축을 위해 기부하고 성당 지하실로 거처를 옮긴다. 그 당시 가우디는 성당 건축에 전념하느라 외모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옷도 사 입지 않고 이발도 하지 않은 채 허름한 모습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산책하고 돌아오다가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사고로 쓰러진 가우디의 허름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를 부랑자로 오인하여 방치해 골든타임을 놓쳤고, 뒤늦게 이를 발견한 가우디 제자들이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고 3일 만에 사망하게 된다. 그의 나이 74세 때였다. 40여 년 이상을 사그라다 파밀리아 완공을 위해 전력질주하던 가우디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그가 항상 기도하던 신의 곁으로 떠났다. 가우디 사후, 가우디 제자들이 그가 남겨놓은 조형물을 연구하여 자료를 재해석하고 복원하여 최대한 가우디가 원하는 모양대로 설계를 해 건축 중에 있다. 가우디가 사망한 지 100주년이 되는 2026년, 지상 최대 걸작품이 완성될 예정이다.
혼신의 힘을 바쳐 성당 건축에 매달렸던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기존의 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독특하고 창조적인 것을 추구하던 가우디. 쓸쓸하게 떠나간 그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허무함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지금도 국적, 인종, 종교를 뛰어넘은 세계인들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마력을 추구한 가우디의 열정적이고 치열한 삶을 생각하며 그곳을 나왔다.
구엘 공원은 마치 동화 속 나라에 온 것 같이 아기자기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이곳은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으로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카르멜 언덕 위에 있으며, 공용 공원과 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안토니 가우디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이 최고의 전원주택 단지를 만들기 위해 땅을 구입했으나, 도시와 너무 동떨어진 접근성과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호응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화려하게 건축하려 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것을 1922년에 바르셀로나 시의회가 사들여 공원으로 바꾼 곳이다. 타일을 잘게 부수어 모자이크처럼 붙인 장식 건축물들과 인공석굴 등. 자연주의적인 곡선의 미와 창의적인 가우디의 아이디어들이 곳곳에 적용되어 있다.